‹ 목록으로 용사와 마왕, 동거 500일

1화

성수동 골목의 아침은 늘 원두 냄새로 시작된다. 셔터를 올릴 때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쇠의 감촉, 그 뒤로 밀려드는 골목 특유의 습한 공기. 나는 셔터를 올리고 카페 '온기'의 문을 열었다. 간판에 매달린 작은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실감이 든다. "오늘도 첫 손님은 나겠네." 하늘이 뒤에서 앞치마를 두르며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침 햇살처럼 가벼웠다. '또 저 웃음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원두를 갈았다. 그라인더가 돌아가는 소리, 원두가 부서지며 퍼지는 향, 그 익숙한 소음 속에서 하루의 첫 단추를 끼우는 기분. 박하늘, 나와 이 카페를 같이 운영하는 동료이자 룸메이트. 3년 전 이 골목 끝자락에 있던 작은 상가를 발견했을 때부터 우리는 함께였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나를 향해 지나치게 다정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굳이 사과하지 않는 것도, 커피를 건널 때 손가락이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도.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게 편했으니까. 굳이 그 다정함의 이유를 캐물으면 우리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았다. "도연아, 오늘 신메뉴 손님한테 먼저 권해볼까?" "손님 오면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원두 그라인더의 소음에 몸을 맡겼다. 이렇게 짧게 끊어내는 게 나의 방식이었다. 말을 길게 늘어놓으면 그녀가 웃으며 다가올 여지를 주는 것 같아서, 나는 늘 대답을 짧게 잘랐다. 그때 문이 열리며 종이 울렸다. 첫 손님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들어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낡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는 손, 손목에 감긴 오래된 시계. 셔츠 소매는 다림질이 잘 되어 있었지만 팔꿈치 부분만 유독 반질거렸다. 걸음걸이는 절도가 있었고, 등받이에 등을 붙이지 않고 반쯤 세워 앉는 자세도 눈에 들어왔다. '군인이었거나, 아니면 그 비슷한 걸 오래 한 사람이다.' 관찰하는 습관은 언제부터 몸에 붙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주문을 받으러 다가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순간, 그의 손목에서 반짝인 시계의 유리 표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런데 그 얼굴이 이상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갑옷을 입고, 뺨에 피가 튄 얼굴.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듯 밀려들어왔다. 캠퍼스의 벚꽃, 도서관 냄새, 누군가의 웃음소리. 강의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봄바람, 손끝에 묻은 잉크 냄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건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불타는 성벽, 비명, 검을 든 손. 쇠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 뜨거운 것이 얼굴에 튀는 감각, 목이 타는 듯한 갈증. '이게 뭐지.' 나는 카운터를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손바닥에 닿는 카운터의 차가운 표면만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걸 겨우 붙잡아주고 있었다. 눈앞이 흔들렸다.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있던 나, 이름은 설하은이 아니라 그냥 도연이었던 나. 그런데 그 옆자리엔 늘 유서리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다. 장난기 많고, 웃음이 헤픈 아이. 노트 필기를 대신 해주면 늘 초콜릿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절대 지키지 않던 아이. 그 얼굴이 지금 내 눈앞의 박하늘과 겹쳐졌다. '말도 안 돼.' 말이 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겹쳐진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이 컵을 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나와 같은 종류의 흔들림이었다. 컵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늘아." 내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확신했다. 지금 그녀도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검은 로브, 뿔 달린 왕좌, 그리고 나를 향해 검을 겨누던 자신의 모습을. 왕좌 아래로 흐르던 붉은 강, 그 위에 비치던 서로의 얼굴,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검자루의 감촉까지. 손님이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저기, 커피가..." 남자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나는 컵을 놓칠 뻔했다. 뜨거운 커피가 손등에 튀었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갗이 붉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는데도, 그 감각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최후의 결전, 무너지는 성벽, 그리고 검을 맞댄 채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 용사 설하은과 마왕 유서리. 그게 나였고, 저 여자였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려 했던 그 순간이 진짜였다는 거야.' 머릿속에서 짜맞춰지는 조각들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오히려 지금 서 있는 이 카페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카운터 뒤로 물러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아서 카운터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하늘도 앞치마를 움켜쥔 채 벽에 기대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으로만 서로를 확인했다.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손님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그 몇 초가 마치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네, 죄송합니다. 잠깐 현기증이 나서요."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하늘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앞치마 끈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연아... 아니, 설하은." 그녀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가슴 한복판이 차갑게 조여드는 감각,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그 낯선 긴장. 이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그 세계에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려 했던 숙적이었다. 창가 자리의 남자는 여전히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우리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고, 그라인더는 여전히 낮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이 골목, 이 카페, 이 아침의 원두 냄새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던 그 익숙한 다정함이, 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이제야 알아버린 것이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