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다.
무너지는 성벽, 불타는 하늘, 그리고 쓰러진 동료들.
불꽃이 성벽을 타고 오르던 순간의 열기까지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지켰어야 했다.'
용사라는 이름을 달고, 나는 파티원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최후의 결전에서 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검사 이준, 궁수 세하, 그리고 나보다 어렸던 회복 마법사 하영.
이준은 늘 앞장서서 방패 역할을 자처했고, 세하는 후방에서 냉정하게 활시위를 당기던 사람이었다.
둘 다 나를 믿고 등을 맡겼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하영.
하영의 이름을 떠올리자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녀는 파티에서 가장 어리고, 가장 총명한 아이였다.
늘 나를 언니처럼 따랐고, 나를 지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전투가 끝나면 항상 내 소매를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던 손길이 떠올랐다.
"언니, 여기 또 다쳤잖아요. 왜 말을 안 해요."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회복 마법을 걸어주던 그 작은 손이, 지금도 눈에 밟혔다.
그런데 그 결전에서, 나는 그녀를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배신자의 검이 등 뒤에서 날아들던 순간, 나는 하영을 감싸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반대쪽에서 다른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때 조금만 더 빨랐다면.'
소용없는 후회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같은 자리를 헤매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배신자에게는 오로지 죽음뿐이라고, 그때 나는 다짐했었다.
그 얼굴을, 그 목소리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료라 믿었던 자의 미소가 마지막 순간 얼마나 차갑게 뒤틀렸는지도.
그런데 지금, 이 조용한 서울의 밤 속에서 그 다짐은 아무 힘도 없었다.
복수할 대상도, 지켜야 할 동료도 없는 이곳에서, 그 다짐은 그저 오래된 흉터처럼 가슴 한쪽에 눌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맨발에 닿는 마룻바닥이 서늘했다.
밖은 고요했다.
네온사인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간판 불빛 하나가 깜빡거리다 꺼지고, 다시 켜지는 걸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삶을 지켜야 한다.'
다연국에서 실패했던 걸, 여기서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하늘과 이 카페, 그리고 지금의 평범한 일상.
작은 카페 하나를 겨우 굴리며 사는 처지였지만, 그마저도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소중했다.
이건 내가 다시 얻은 두 번째 기회였다.
그러려면 정체를 완전히 숨겨야 했다.
용사였다는 사실, 마왕과 함께 있다는 사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됐다.
들키는 순간 이 조용한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질 게 분명했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하늘이었다.
문틈으로 새어드는 복도 불빛에 그녀의 옆얼굴이 반쯤 걸쳐 있었다.
"안 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잠이 안 와서."
"나도."
그녀는 내 옆에 다가와 창밖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깨가 살짝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 하나가 그 침묵을 잠깐 깨뜨렸다가,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도연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뭔가를 재는 듯한 어투였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될까."
"뭐가?"
"우리 관계."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 타이밍에 그걸 물어본다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이 읽혔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지금도... 나는 너한테 마음이 있어."
그녀의 고백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건 마왕이었을 때도 그랬고."
나는 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늘 나를 다르게 바라봤었다.
적이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전장 한복판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그녀의 검끝은 늘 내 목숨을 겨눈 것치고는 이상하게 무뎠다.
그때는 그게 그저 방심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건 방심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정리가 안 됐어."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 책임감, 그리고 뒤늦게 밀려오는 이 낯선 감정까지.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괜찮아. 천천히 해."
그녀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따뜻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굳은살이 스치듯 느껴졌다.
전생에서 검을 쥐었던 손이, 지금은 커피잔을 나르는 손이 되어 있었다.
그 온도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근데 하나는 확실해."
내가 말했다.
"나는 이제 이 삶을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을 뱉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을 주었다.
하영을, 이준을, 세하를 지키지 못했던 그 실패를 여기서 또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도와줄게. 이번엔 같은 편이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전생에서는 적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이렇게 내 옆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창밖 저 멀리, 낯선 그림자 하나가 골목 어귀에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서 있는 자세만은 어딘가 익숙했다.
무언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