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후, 평범한 오후였다.
햇살이 카페 창문을 뚫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옅은 그림자를 그렸다.
손님이 뜸한 시간, 나는 카운터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기를 닦아낸 유리컵을 하나씩 선반에 올려놓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이런 평온한 시간이 얼마나 갈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종이 딸랑 울리며 문이 열렸다.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낡은 백팩을 멘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마른 체형.
백팩의 어깨끈은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있었고, 신발 끝은 닳아서 실밥이 드러나 있었다.
오랜 여정을 거쳤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빛.
익숙하면서도 낯선 눈빛이었다.
'설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하영..."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반가움이 아니었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서글픔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찾았다."
하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목소리엔 오랜 시간 억눌러온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언니."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카페 안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나는 손에 든 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 느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다연국에서의 마지막 기억 속, 하영은 분명 그곳에 남아 있었다.
아니, 남아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알던 세계의 마지막 그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여기, 서울 한복판의 카페에 서 있었다.
낡은 백팩과 지친 얼굴로.
"오랜만이에요, 언니."
그녀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칼끝처럼 벼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하늘이 주방에서 나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접시를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하영의 시선이 곧바로 그녀를 향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 여자랑... 같이 있어요?"
하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를 억누르는 게 눈에 보였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언니가 저 여자랑, 같은 카페에서, 이렇게..."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 핏기가 살짝 배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카운터를 사이에 둔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었다.
"하영아, 여기서 이럴 일이 아니야."
"이럴 일이 아니면 뭐예요?"
그녀가 매섭게 되물었다.
"저 여자는 마왕이었어요. 우리 파티원들을 죽인 존재라고요."
그 말에 카페 안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마침 손님 두어 명이 있었지만, 다행히 다른 자리에서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만이 다행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진정하고 얘기하자."
"진정? 언니, 나는 지금까지 언니를 찾으려고 얼마나..."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억지로 삼켜냈다.
눈물을 삼키는 그 모습에서, 예전의 하영이 겹쳐 보였다.
파티를 이끌던 시절에도 그녀는 늘 그랬다.
울고 싶은 순간에도 표정을 다잡고 냉정을 유지하는 아이였다.
"됐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녀가 냉정하게 표정을 바꿨다.
순식간에 눈빛에서 감정의 흔들림이 사라졌다.
'저 표정 전환, 예전 그대로다.'
총명하고, 감정을 빠르게 정리하는 능력.
파티에서 가장 어렸지만, 가장 이성적이었던 하영.
그녀는 백팩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수첩의 표지는 여러 번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랜 시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거 보세요."
수첩 속엔 낯익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다연국의 마족 표식.
붉은 잉크로 거칠게 그려진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최근 이 도시에서 마족의 흔적이 감지됐어요."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깔린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저는 그걸 쫓다가... 언니를 찾은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족의 흔적이라니.
이 평범한 서울 한복판에.
내가 아는 서울은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곳이어야 했다.
하늘의 표정도 굳어졌다.
접시를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묻자 하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예전 전장에서 지휘를 내릴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마왕이 있는 곳에, 마족 잔당도 함께 있다는 뜻이겠죠."
그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적의가 뚜렷하게 담긴 눈빛이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하늘을 향한 오랜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가 저 여자랑 있는 한, 이 도시도 위험해질 거예요."
단호한 그 말에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늘이는...'
내가 속으로 반박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그 말과 동시에, 카페 유리창 밖으로 무언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빛의 각도가 순간적으로 뒤틀린 것 같은, 기묘한 잔상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골목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 그늘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흐린 실루엣만이 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그렇게 넘기려던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이상한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느껴져."
그 한마디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운터 위에 놓인 하영의 수첩과, 하늘의 굳은 시선.
그 사이에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이미 이 도시 안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우리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이 순간을 정확히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