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안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 강채원은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있었다. 여섯 달째 부풀어 오른 배가 치맛자락 위로 둥그렇게 도드라져 있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고, 마루 끝에는 어젯밤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서이헌은 그 배를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마당 쪽으로 돌렸다. 마당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는 채원이 시집을 때 함께 옮겨 심은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이 떠오른 게 하필이면 잔인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낮은 만큼 더 잔인했다.
"채원아. 나는 소이를 떠날 수가 없다."
그 한마디를 뱉기까지 그가 며칠을 뒤척였는지, 채원은 알 도리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이헌의 눈 밑이 거칠어진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밤새 무언가를 고민하는 시늉은 했구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러셔야지요." 채원이 답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이헌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왜 저렇게 태연한 거지.' 이헌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내가 울고 매달리기라도 하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못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불쌍한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이헌은 손끝으로 마루 기둥을 문질렀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채원이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은 다 끝난 것이냐." 채원이 물었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래." 이헌이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안도와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지만, 채원은 굳이 그것을 구분해서 읽어주지 않았다.
***
윤소이는 방문 밖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정확히는,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이헌이 알도록 서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그녀의 걸음은 느렸고, 옷깃을 여미는 손짓은 가여워 보였다. 실제로 소이는 스스로도 그 몸짓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이 살짝 흔들렸는데, 그것조차 계산된 흔들림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인." 소이가 마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는... 그저 서방님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눈가에는 벌써 물기가 맺혀 있었는데, 채원은 그 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소이의 눈물은 늘 정확한 순간에 나타났으니까.
채원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헌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다시 우는군.' 채원의 속내는 그렇게 정리되었다. 열네 살 때도 저랬다. 소이는 늘 울었고, 이헌은 늘 그 울음 앞에서 무너졌다.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혼례 첫날밤, 이헌이 신방을 나가 소이를 찾아갔던 날. 그때도 소이는 저런 얼굴로 울고 있었고, 이헌은 저런 얼굴로 흔들렸었다. 벌써 몇 해 전 일인데, 어째서인지 조금도 낡지 않은 기억이었다.
"소이는 약한 사람이다." 이헌이 말했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판결이었다.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저 애는 살 수가 없어. 하지만 채원이 너는..."
말이 잠시 끊겼다. 채원은 그 뒤에 이어질 문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외운 대본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
"너는 강하니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채원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작게 발을 뻗었다. 그 감각이 하필 지금 느껴진다는 게 서러웠지만, 채원은 그마저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강하다니.' 채원은 생각했다. '내가 강해서 버려지는 거라면, 강함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강하면 버려지고, 약하면 지켜진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강함이란 벌이었다. 채원은 그 논리를 곱씹으며 손끝으로 배를 한 번 더 쓸었다. 배 속의 아이는 아직 이 어리석은 셈법을 모를 테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순종하는 여인의 자세였다.
"알겠습니다, 서방님. 그리하겠습니다."
이헌은 그 대답에 안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깨가 살짝 내려앉고, 미간의 주름도 조금 펴졌다. 어쩌면 아내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주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집은..." 이헌이 덧붙였다. "당분간 네가 맡아주어야겠다. 소이와 나는 별채로 옮길 것이니."
채원은 그 말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별채로 옮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집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소이는 그런 이헌을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채원 쪽으로는 고개가 돌아가 있지 않았기에 이헌은 보지 못했다.
채원은 보았다.
그 미소는 울음보다 훨씬 정직했다. 채원은 그것을 눈에 새겨두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다.
***
그날 밤, 채원은 자신의 방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방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낮의 소란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울지 않았다. 놀랍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채원은 손끝으로 배를 쓸며 낮게 중얼거렸다. "강한 게 잘못이라면, 더 강해지면 되는 거지."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다짐이었다.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갑을 열었다. 안에는 혼례 때 받은 옷감과 몇 장의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 시집을 때 친정에서 몰래 챙겨준 땅문서 한 장을 꺼내 촛불 아래 펼쳤다. 글자를 다시 한 번 읽어 내려가는 채원의 눈빛이 낮보다 훨씬 차가웠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했지.'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줄 참이었다. 다만 이헌이 상상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다 이내 멈추어 섰다. 채원은 문서를 서둘러 접어 소매 속에 넣고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다짐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