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헌은 요즘 부쩍 잠을 설쳤다.
채원과 헤어지겠다는 말을 뱉은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이면 천장의 나뭇결을 세다가 새벽을 맞이하는 일이 잦았고, 낮이면 헛기침을 하며 하품을 삼키는 일이 늘었다. 몸종들은 서방님의 안색이 나날이 나빠진다고 수군거렸지만, 정작 이헌 자신은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이헌은 스스로 그렇게 되뇌었다. '채원은 강하다. 소이는 약하다. 나는 약한 쪽을 지키는 게 맞는 사람이다.'
그는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었다.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도 곱씹었고, 서책을 펼쳐놓고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곱씹었다. 그 논리는 언제부턴가 그의 머릿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이상한 것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아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 문장 뒤에 겹쳐 들리는 듯도 했다. 하지만 이헌은 그 느낌을 붙잡지 못했다. 붙잡으려 하면 이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그날 오후, 소이가 이헌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녀는 늘 그렇듯 조용히, 마치 그림자처럼 문 앞에 서 있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이헌은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가 이미 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서방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소이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잔잔했다. 마치 물결이 잔뜩 죽은 연못 같았다.
"채원이 걱정이 되어서." 이헌이 솔직하게 답했다. "저 애가 너무 태연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는 손끝으로 서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채원과 이혼을 언급한 그날 이후로, 채원은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이 방씨를 만나고, 몸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챙겨 먹었다. 그 태연함이 이헌에게는 오히려 불편했다.
소이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이헌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보았다면 이헌은 아마 그날 밤 다시 잠을 설쳤을 것이다.
"부인은 강한 분이십니다." 소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지난번 마루에서 이헌이 했던 말과 똑같은 문장이었다. "강한 분이시니, 서방님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헌은 그 말에 다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자기 스스로 만든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심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겠지." 이헌이 중얼거렸다. "채원은... 원래부터 강한 여자였으니까."
소이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한 뒤, 다시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었다.
이헌은 홀로 남아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 건지,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
그날 밤, 소이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방 안은 촛불 하나만이 켜져 있어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낮보다 훨씬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방 안쪽 깊은 곳, 옷장 뒤에 숨겨둔 작은 서찰함을 꺼냈다. 나무로 짠 함은 겉보기에는 평범했지만, 뚜껑 안쪽에 작은 자물쇠가 하나 더 달려 있었다. 소이는 소맷자락에서 얇은 열쇠를 꺼내 그것을 열었다.
서찰 한 장을 펼쳐 읽으며, 소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채원이 요즘 방씨와 몸종들을 부쩍 자주 만난다고 합니다."
글씨는 낯선 필체였지만, 소이는 그 필체의 주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이레 만에 다녀간 유서방이 남긴 것이었다. 유서방은 겉으로는 저잣거리를 떠도는 잡화상이었지만, 실은 이 집안 곳곳에 눈과 귀를 심어두는 자였다. 소이가 그를 부린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흠." 소이가 낮게 웅얼거렸다. "움직이기 시작했군."
예상보다 빠른 반응이었다. 채원이라는 여인은 늘 순종적이고 조용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눈치를 챌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남편에게 매달리거나, 혹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채원은 오히려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소이에게 불안보다는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강채원." 소이는 그 이름을 나지막이 곱씹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여자였네."
그녀는 서찰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방씨가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어느 몸종이 채원의 편에 섰는지, 소소한 정보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소이는 그 글자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톡. 그 규칙적인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재미있는 여자였다.' 소이는 다시 한번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상대다운 상대였다. 그동안 소이가 상대해온 여인들은 대부분 너무 쉬웠다. 눈물 몇 방울, 말 몇 마디로 충분히 흔들렸다. 그런데 채원은 다르다는 예감이 들었다.
서찰을 촛불에 가까이 대었다. 종이가 타들어가며 방 안에 매운 연기가 잠시 퍼졌다. 소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소이는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다음 수를 어떻게 둘지 벌써 셈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재를 손끝으로 문질러 흩뜨린 뒤, 다시 서찰함을 옷장 뒤로 밀어 넣었다.
"다음에는 좀 더 가까이서 지켜봐야겠어." 소이가 혼잣말을 했다. "유서방을 다시 부르는 게 좋겠군."
창밖 어둠 속으로, 채원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여인 모두, 그 밤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하나는 상대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 시선을 알지 못한 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밤이, 두 여인 사이에 벌어질 길고 조용한 싸움의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