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혼자가 딴 여자에 미쳤다니

1화

어머니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도 온기가 돌아오길 바랐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수아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실처럼 얇았다. "네,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나는 대답하며 목이 메었다. '울면 안 된다. 어머니가 불안해하실 것이다.' 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었다. 방 안에는 탕약 냄새와 향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겨울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빗소리는 마치 시간을 재촉하는 듯했다. 어머니는 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 말을 이었다. "너는 강해야 한다. 나처럼 살지 말고."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손끝이 더 차가워졌다. 의관이 들어와 맥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내관이 조용히 문을 열어 밖에 대기하던 이들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부터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통째로 도려내진 듯한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하고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나를 부축해 방 밖으로 이끌었지만, 나는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장례가 끝나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편전으로 향하는 길, 궁녀들이 나를 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를 잃은 왕녀를 보는 것이 저들에게도 편치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시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청우국의 왕, 이건은 내 앞에서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용포 자락을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다. 무언가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이다.' 아버지는 몇 번인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수아야, 대현국과의 혼약이 결정되었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대현국이라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반세기 가까이 다투어온 나라였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름이었다. 전쟁, 원한, 그리고 죽음. 그 단어들이 대현국이라는 이름과 함께 항상 따라붙었다. "제가, 대현국의 왕과……"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렇다. 도재헌이라는 자다. 젊은 왕이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미안함은 나에게 향한 것이고, 안도는 나라를 향한 것이겠지.' 나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해낼 수 있을 만큼은 자라 있었다. "국경 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오래도록 백성들이 국경에서 죽어갔다. 이 결혼으로 그 죽음을 멈출 수 있다면……" 아버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절한다 해도 결국 다른 방식으로 강요될 일이다.' '차라리 지금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낯선 나라의 왕비가 되어야 했다.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역할이 강제로 얹혔다. 애도할 시간조차 온전히 허락되지 않는 것이 왕가의 딸이라는 자리였다. '이것이 왕가의 딸로 태어난 자의 몫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언제 떠나야 합니까." "두 달 후다." 두 달. 어머니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궁을 떠나기까지, 겨우 두 달이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방을 나서는 길, 복도 저편에서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폐위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왕태자입니다!" 이헌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저렇듯 날이 서 있었다. 대신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진정하시라 말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발걸음 소리, 옷자락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낮은 만류가 뒤엉켜 복도를 채웠다. '오라버니는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일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본다 해도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나보다 오라버니를 더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태자와, 나라를 구할 정략결혼의 재료가 된 왕녀. 그 온도 차가 씁쓸했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으되, 하나는 다스려야 할 골칫거리이고 하나는 이용해야 할 도구였다. 하지만 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강하늬를 방으로 불렀다. 장군 가문의 딸이자 나의 시녀, 그리고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 얼굴을 살폈다. 평소라면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아이가, 오늘은 표정을 굳힌 채 다가왔다. "들었어?" "들었습니다." 하늬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두 눈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대현국이라니요. 국경에서 우리 아버지가 잃은 병사가 몇인지 아십니까." "알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가야 해." "그래도라니요! 저하께서는 지금……" 하늬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늬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눈빛은 걱정이다. 나를 위한 걱정.' "제가 함께 갑니다." 하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저하를 곱게 볼 리 없습니다. 누군가는 곁에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장군의 딸로 태어나, 검을 쥐는 법을 배운 아이였다. 궁의 시녀들 중 누구보다 강단이 있는 아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하늬야."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냥……" 하늬가 말끝을 흐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창밖으로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매화나무가 보였다. 꽃이 다 떨어진 가지가 앙상했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가지의 모습이 유난히 쓸쓸하게 보였다. 그 앙상함이, 지금 내 마음과 닮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는 오라버니만을 보고 있고, 나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하늬뿐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두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너는 강해야 한다. 나처럼 살지 말고. 그 말이 마치 유언처럼, 아니 명령처럼 가슴 깊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품은 채, 낯선 나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두 달 후, 나는 이 궁을 떠나 원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 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기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말대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 창밖의 매화나무 가지가 바람에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마치 나에게 무언가를 경고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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