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혼자가 딴 여자에 미쳤다니

5화

밤이 깊어지자 별채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잠겼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마당은 먹물을 부어놓은 듯했다. 나는 문밖 작은 방에 마련된 시녀용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은 얇고 눅눅했다. 시녀에게 내려오는 것이 딱 이 정도였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유하람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두려움과 익숙함이 함께 담긴 눈빛이었다.' 낮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나는 몇 번이고 되짚었다.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속에 홀로 던져진 왕녀라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익숙함은 달랐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자에게서만 나오는 감정이었다. '무엇에 익숙해졌다는 것일까.' 나는 그 의미를 곱씹다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바람이라면 이렇게 규칙적일 리가 없었다. 무언가가 담을 넘는 소리였다. 쓱, 쓱, 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발끝이 담벼락을 짚는 미세한 마찰음.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내는 소리조차 최대한 죽였다. 창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니, 호위병 두 명이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 명은 얼굴을 땅에 처박은 채, 다른 한 명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숨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기척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머릿속이 차갑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지금 망설이면 안 된다. 나는 곧바로 유하람의 방으로 달려갔다. 발소리를 죽이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문을 열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어깨의 너비와 다리의 보폭으로 보아 성인 남자, 그것도 훈련받은 몸이었다. 유하람은 침대 구석에 몸을 붙이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구냐!"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침입자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천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이 아무런 동요 없이 나를 훑었다. 순간, 그의 손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단검이었다. 칼날이 어둠 속에서도 유독 희게 빛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칼날이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렸다. '놓치면 유하람이 위험하다.' 몸을 일으키며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그 순간, 방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하늬가 뛰어들었다. 아니, 하늬였다. 왕녀 행렬을 이끌던 그녀가 어느새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걸 보면, 이미 심상찮은 낌새를 느끼고 방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예정보다 빠르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늬는 검을 뽑아 침입자와 맞섰다. 철컥,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침입자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했다. 손목의 회전, 발의 디딤, 상체의 각도까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하늬의 검술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는 침입자의 손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고, 침입자는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핏방울이 바닥에 튀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하람을 감싸 안으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의 몸은 종잇장처럼 가볍고, 동시에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두려움이 그렇게 사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침입자가 방향을 바꿔 나와 유하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야 한다.'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손에 잡힌 촛대를 휘둘렀다. 촛대가 침입자의 팔을 강하게 후려쳤고, 그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었다. 쇠와 살이 부딪히는 둔중한 소리가 손끝까지 전해졌다. 그 동작이 이상하게도 몸에 익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훈련받은 사람처럼, 팔의 각도와 힘의 배분이 정확했다. 체중을 옮기는 순서, 팔꿈치를 접는 각도, 손목을 튕기는 타이밍까지. 나 자신도 그 사실에 놀랐다. '지금 이건, 평범한 왕녀의 몸놀림이 아니다.' 내 몸이 낸 소리에, 내 머리가 더 놀라고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배웠지.' 하지만 그 생각을 이어갈 틈이 없었다. 하늬가 다시 검을 휘둘러 침입자의 다리를 베었다. 붉은 선이 그의 다리를 타고 번졌다. 침입자는 낮게 욕설을 삼키며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유리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방바닥에 흩어졌다. 하늬가 곧바로 뒤쫓았지만, 침입자는 이미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깨진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들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나는 여전히 유하람을 감싸 안은 채,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아릴 정도로 가슴이 들썩였다. 유하람의 몸이 내 품 안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새 한 마리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지켜냈다.'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유하람이 천천히 나를 밀어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손끝이 내 어깨를 밀어내는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 대신, 짙은 의심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눈동자가, 지금은 나를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 방금……. 그 몸놀림은……" 유하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범한 시녀가 아니시죠."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들켰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하늬 역시 검을 든 채,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칼끝에서 아직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주었다. "놀라서 몸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유하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마치 다시 그 순간이 다가올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그 사람이…… 또 올 거예요." 그녀의 중얼거림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방금까지의 안도감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또 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유하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의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이미 몇 번이고 이런 밤을 겪어본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창 너머, 담장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곧 어둠에 완전히 삼켜졌다. 숨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 몸놀림이, 방금 방 안에서 보았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저 자가 향한 곳이 어디일까.' 나는 그 방향을 눈으로 좇았지만,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의 어둠은 모든 흔적을 지워버릴 만큼 깊었다.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습격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 계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 궁 전체를, 어쩌면 두 나라의 평화 자체를 흔들려는 더 큰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 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게 뻗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품 안에 남은 유하람의 떨림을 느끼며, 조용히 다음 위협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늬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이번에는 걱정이 아니라, 명백한 질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나는 그 질문에 아직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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