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녀 뒷수습이 내 몫이라니

1화

천장의 무늬를 세는 것도 오늘로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대현 왕국 제1왕녀궁, 정확히는 내 침실 천장에는 촛농이 흘러내린 자국처럼 생긴 무늬가 스물세 개 박혀 있는데,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걸 세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왜 스물세 개인지, 왜 하필 저 위치에 저런 모양으로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거나 저 무늬들이 매일 아침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대상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다른 할 일이 없어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할 일이 있어도 하면 안 되는 몸이라서였다. 병약한 왕녀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런 설정이니까. "왕녀님, 기침하셨습니까." 미연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이불 속에서 눈만 굴렸다. 성년식까지 남은 날짜, 오늘로 정확히 열이레. 나는 그 숫자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몸을 일으켰는데, 이게 무슨 시험 D-day 세는 것도 아니고 자꾸 이런 식으로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어보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긴 건지 나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열이레. 열이레 후면 나는 성인이 되고, 성인이 되면 이 왕궁에서 내 위치가 애매하게라도 확정될 것이고, 확정되면 적어도 지금처럼 병약한 왕녀 코스프레를 계속할 필요는 없어질 거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이게 계산대로 흘러갈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지만. 애초에 세상일이 계산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나. 없었다. 단 한 번도. "들어오게." 미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고양이처럼 눈을 살짝 접었다. 저 눈매를 볼 때마다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는데, 그건 미연이 유일하게 내 진짜 얼굴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아챌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 궁 안에서 나를 진짜로 걱정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나는 그 마음을 이용하는 게 못내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매번 삼켰다. 처음 이 궁에 배정됐을 때만 해도 미연은 나를 대하는 게 서툴렀는데, 지금은 내 기침 소리 하나만으로도 오늘 상태가 어떤지 짚어낼 정도가 됐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나는 대체 몇 년째 이 여자를 속이고 있는 걸까. "오늘도 몸이 좋지 않으신 걸로 알려두었습니다." "고생했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오늘 하루도 조회에 나가지 않고, 예법 수업도 빠지고, 왕궁 정원의 티타임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을 예정이었다. 병약한 왕녀라는 설정을 십여 년 가까이 유지해온 덕에 이제는 누구도 내가 정원을 산책하러 나가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상태가 조금 낫다고 여기겠지. 나는 이 위장이 얼마나 편리한지 다시금 실감하며, 동시에 이게 언제까지 유효할지 슬며시 걱정이 됐다. 세상에 완벽한 거짓말은 없다잖아. 언젠가는 이 거짓말도 바닥을 드러낼 텐데, 그 언젠가가 성년식 전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미연이 아침 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이런 식으로 멍때리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스스로도 좀 한심했지만, 병약한 왕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뭐가 있겠나. 자수를 놓거나, 시를 읽거나, 창밖을 보거나. 나는 자수도 서툴고 시도 별로 흥미가 없어서 결국 창밖 보기로 낙찰됐다. 창밖으로 왕궁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이상한 위화감에 휩싸였는데, 이게 왜 이렇게 익숙하지, 라는 생각이었다. 처음 겪는 풍경인데도 마치 몇 번이나 본 적 있는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이런 감각이 든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이 몸으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이 어딘가 데자뷔처럼 느껴졌었다. 나무 이파리 흔들리는 방향, 정원사가 가위질하는 리듬, 심지어 저 멀리서 들리는 새 울음소리까지도. 마치 예전에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듯한,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런 감각이었다. 나는 이 감각을 십수 년째 무시하며 살아왔다. 왜냐고? 무시하지 않으면 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 답이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일 것 같은 예감이 있었으니까. 거울 앞에 서서 옷매를 정리하던 나는, 문득 손끝이 저리는 느낌에 멈춰 섰다. 이건 또 뭔가. 최근 며칠 사이 이런 식으로 몸이 갑자기 이물감을 느끼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마치 뭔가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려고 계속 두드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했다. 그다음엔 날씨 탓인가 했다. 그런데 이게 사흘, 나흘, 벌써 일주일 가까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라고 우길 수 없는 지점이었다.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은발에 가까운 옅은 금발과 회청색 눈동자를 가진 열일곱 살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 얼굴은 분명 처음부터 내 것이었는데도, 오늘따라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저 눈동자가 내 것이 맞나. 저 눈매가 내가 매일 보던 그 눈매가 맞나. 이상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한동안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녀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미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웃어 보였는데,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했지만 속으로는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 감각, 낯설지 않은 이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자기기만인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자기기만이 얼마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지도.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 스쳤다. 형광등 불빛, 회의실 책상, 누군가 던진 서류 뭉치. 낯선 풍경들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가 물러갔는데, 나는 그 순간 숨을 크게 삼켰다. 이게 뭐지. 형광등이라니. 회의실 책상이라니. 이 세계엔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는데, 나는 방금 본 게 무엇인지 정리할 틈도 없이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단순한 두통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런 게 예감이라는 건가. 아니면 뭔가가 마침내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신호인가. "왕녀님!" 미연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릎이 꺾이는 걸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눈앞에서 형광등 불빛과 왕궁 침실의 천장 무늬가 겹쳐 보이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촛농 자국 스물세 개와 사각형 형광등 하나가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나는 눈을 감아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완전히 다른 기억 하나가 마치 오래 잠겨 있던 문이 활짝 열리듯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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