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녀 뒷수습이 내 몫이라니

3화

그날 이후 나는 며칠에 걸쳐 미연을 통해 조각조각 정보를 모았다. 왕녀가 갑자기 정치에 흥미를 보이는 건 이상해 보일 수 있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저 궁 안 사람들 사이의 뒷담화 정도로 포장해서 물었다. 티 안 나게, 아무 생각 없이 심심해서 묻는 척, 나는 이런 연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전생에도 남 눈치 보며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런 궁중 정치놀음에서 밀릴쏘냐. 미연은 눈치가 빠른 아이였지만 다행히 내가 진짜 목적을 숨기는 데는 큰 의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마 병약한 왕녀가 심심해서 소문을 캐묻는다고만 여겼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까지 침상에서 앓는 소리나 내고 창밖만 보던 존재감 없는 왕녀였으니까. 갑자기 총명해진 척하면 오히려 의심받을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계속 몸이 약하고 심심한, 그저 그런 왕녀인 척을 유지했다. "강태윤 전하께서는 성정이 급하시고, 한미래 영애님 일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는 평이 있습니다." 미연이 조심스레 전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소설 속 기억을 다시 되짚었다. 강태윤. 후궁의 소생으로 제2왕위 계승권자였고, 왕비인 내 어머니 명주님의 딸인 내가 사실상 제1왕위 계승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늘 콤플렉스로 작용했다는 설정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는 한미래를 만나면서 점점 이성을 잃어갔고, 결국 어느 시점에 큰 사건을 벌인다는 게 소설의 핵심 갈래였다. 원작을 읽을 때는 그냥 '아, 저 남자 진짜 답 없다' 하고 넘겼는데, 이제 그 답 없는 남자가 내 이복동생이라니. 인생 참 얄궂다. "성정이 급하다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 "작년 겨울, 마구간지기가 말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매를 들려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서 만류하여 큰일은 없었습니다만."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이거 완전 시한폭탄이잖아. 마구간지기한테도 저 정도면 사람 하나쯤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뜻인데.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윤소하 공작영애님은 어떠신가." "고결하고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 강태윤 전하와의 혼약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궁 안에서도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입니다." 나는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윤소하. 소설 속에서 그녀는 결국 근거 없는 누명을 쓰고 파혼당한 뒤 몰락하는 운명이었다. 나는 그녀를 실제로 본 적이 몇 번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본 인상으로는 도저히 그런 악행을 저지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남에게 흠잡히지 않으려 매 순간 완벽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걸음걸이 하나, 인사하는 자세 하나까지도 각도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몰락한다는 게 소설이라 가능한 전개지, 현실이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일이었다. "윤소하 영애님 쪽에서는 요즘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으신 듯합니다. 다만... 강태윤 전하께서 최근 한미래 영애님을 자주 찾으시는 것을 두고, 두 분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역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받았다. 소설의 흐름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직 대놓고 사고는 안 쳤지만, 물밑에서는 판이 짜이고 있는 것이다. "한미래 영애는 어떤 사람인가." 미연이 이번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여리고 눈물이 많은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궁 안 예법에는 다소 익숙지 않으신 듯합니다. 남작가 출신이시니 아무래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소설 속 설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히로인. 낮은 신분이지만 남자들의 보호욕을 자극하는 캐릭터. 그런데 소설 속에서 그녀가 실제로 윤소하를 괴롭힌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오해로 몰린 것인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성년식 즈음에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이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인 디테일은 흐릿한데 결말 방향만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게, 이게 참 사람 답답하게 만든다. 마치 시험 답은 아는데 풀이 과정을 까먹은 느낌이랄까. "미연, 혹시 한미래 영애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가." "글쎄요... 그런 이야기는 딱히 들은 바 없습니다. 다만 강태윤 전하께서 유독 그분을 감싸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시니, 자연히 윤소하 영애님 쪽에서 곱게 보지 않으실 뿐이라고 봅니다." 나는 그 대답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잘못은 아무도 안 했는데 판이 그렇게 짜여 있다는 거잖아. 이게 소설이라는 게 참,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개연성 없는 전개 속에서 실제로 인생이 뒤틀리는 사람은 나와 내 주변의 실존 인물들이었다. 소설이라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방 안을 서성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건 단순한 삼각관계 로맨스가 아니었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정치 싸움이 이 연애극 뒤에 숨어 있었고, 만약 강태윤이 폭주해서 큰 사건을 벌인다면 그 파장은 단순히 개인의 명예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왕국 전체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였고, 잘못하면 계승 구도 자체가 뒤틀릴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그냥 남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 왕국의 제1왕녀였고, 이 사달이 나면 나 역시 그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에서 이 사건이 왕위 계승 서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고. 아, 젠장. 확실하지 않은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 미치게 할 줄이야. 알면서도 모르는 것 같은, 이 어중간한 상태가 제일 고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걸 알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대략적인 방향을 알고 있다면, 나는 이걸 이용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정치판에 정면으로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조연으로 살다가 눈치 없이 앞에 나섰다가 괜히 화살받이가 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원작에서도 존재감 없던 왕녀가 갑자기 사건에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하면, 그게 바로 죽는 지름길이라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였다. 멀리서, 최소한으로, 위험이 나에게 직접 튀지 않도록 관리만 하는 것. "성년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열흘 남았습니다, 왕녀님." 열흘. 나는 그 숫자를 곱씹었다. 소설 속 사건이 정확히 성년식, 즉 졸업 무도회에서 벌어진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나는 그날까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지내다가,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에도 최소한만 개입해서 상황을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그 결심을 하며 스스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순진한 계획이었는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세상만사가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이 세상에 걱정거리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었을 텐데, 나는 그 간단한 진리를 열흘 뒤에야 뼈저리게 깨닫게 될 참이었다. "미연, 앞으로 열흘간은 나를 최대한 조용히 지내게 해주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무도회 준비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야." 미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왕녀님. 다만 성년식 당일에는 반드시 참석하셔야 하니, 그 점만은 유의해주시길." "알고 있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당에는 시녀 몇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너머로 궁의 담벼락이 겹겹이 이어져 있었다. 저 담 안쪽에서, 앞으로 열흘 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대략 알고 있었다. 강태윤이 한미래를 감싸며 윤소하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소설의 초반 클라이맥스였다는 것. 그 정도만 알아도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뒤로 빠져 있으면 될 거라고 믿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돌려봤다. 무도회장 구석에서 얌전히 서 있다가, 소란이 시작되면 조용히 자리를 뜬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는 이미 열흘 전부터 쌓아둔 상태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소란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다음 날을 맞이한다. 이 얼마나 깔끔한 회피 전략인가. 나는 스스로의 계획에 감탄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곧 뼈저리게 깨닫게 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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