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녀 뒷수습이 내 몫이라니

4화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그 사이로 오케스트라 연주 소리가 은은하게 흘렀으며, 어딘가에서는 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향수 냄새와 촛농 냄새가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나는 그저 벽에 붙어서 이 밤을 최대한 조용히 넘길 생각이었다. 열흘 동안 준비한 계획, 그러니까 눈에 띄지 않고 사건이 벌어지면 멀리서 상황만 지켜보다가 자연스럽게 흐름에 맞춰 빠져나가는 전략이었다. 완벽했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왕녀님, 이쪽으로." 미연이 나를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다. 벽 쪽 자리에 도착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딱 좋다. 시야는 확보되면서 시선은 받지 않는 자리, 이런 걸 보고 명당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부채를 살랑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강태윤이 어디 있는지, 한미래가 어디 있는지, 윤소하는 또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게 오늘의 유일한 임무였다. 세 사람의 위치만 파악하면 오늘 밤은 그냥 숨만 쉬다가 돌아가는 걸로 끝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도회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강태윤의 목소리였다. 나는 부채를 접으며 그쪽을 쳐다봤다. 아, 시작됐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무심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강태윤이 윤소하의 팔을 억세게 붙잡고 있었다. 윤소하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옆에서 한미래가 눈물을 흘리며 뭔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눈물, 어디서 봤더라. 소설 속 삽화에서 딱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실제로 보니 감상 따위 할 여유가 없었다. "당신이 미래를 밀쳤잖아! 다들 봤다고!" 강태윤이 소리쳤다. 윤소하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강태윤은 그 말을 끊고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 짜악, 하는 소리가 무도회장 전체에 울렸다.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나 역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강도였다. 소설 속에서는 분명 언쟁 정도로 끝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명백한 폭력이었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 내가 뭘 잘못 건드린 건가. 아니면 원래 이 정도로 미친 인간이었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연달아 튀어 올랐지만 답을 낼 시간은 없었다. 윤소하는 뺨을 감싸며 뒷걸음질 쳤고, 강태윤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 귀족들은 술렁였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를 상대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 몇이나 되겠는가. 다들 저마다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만 굴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서글펐다. 다 큰 어른들이 저렇게 눈치만 보고 있다니.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동시에 내가 나서면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발이 먼저 움직이는데 머리는 아직 멈춰라, 멈춰라, 라고 외치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전하." 결국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열흘 동안 세운 회피 전략,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멀리서 관리만 하겠다는 그 계획이 내 입에서 나온 한 문장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이 감정은 뭘까,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미 발은 앞으로 나가 있었다. 강태윤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짜증과 당혹이 섞여 있었다. "이서연. 넌 상관하지 마라."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저 어투, 저 눈빛, 지금 이성이 반쯤 나가 있다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공작영애를 이렇게 만천하에서 폭행하시는 게 왕자로서 옳은 처사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느껴졌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스스로 되뇌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옮겨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갔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하는 그 압박감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건 왕실의 체면이 걸린 문제입니다." 나는 강태윤과 윤소하 사이에 서서 말을 이었다. 윤소하는 여전히 뺨을 감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원망인가, 아니면 안도인가. 판단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저 여자가 먼저 미래를 괴롭혔어!" 강태윤이 소리쳤다.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증거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논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태윤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의 인간에게 논리를 들이대는 건, 벽에 대고 대화하려는 것과 비슷한 헛수고였다. "증인이 있으신지요, 전하."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강태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한미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미래, 말해봐! 저 여자가 밀친 게 맞잖아!" 한미래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미리 연습한 동작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여리고 눈물 많은 얼굴로 다 감추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도회장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려 있었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윤소하는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완전히 명예를 잃는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전하, 지금 이 자리에서 판단을 내리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명확한 증거와 증인 없이 공작영애를 이렇게 다루시는 건, 왕실의 명예에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 미친놈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속으로는 육두문자를 삼키는 이 괴리감이 익숙하면서도 매번 새로웠다. 강태윤은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 윤소하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분노로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건 끝난 게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두고 봐라, 이서연. 네가 이런다고 진실이 바뀌진 않아." 그는 그렇게 내뱉고는 한미래를 데리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겨우 상황을 진정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방금 내가 벌인 일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윤소하가 뺨을 감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고맙다는 말도, 원망도 아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주변의 귀족들은 여전히 숨죽인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어느샌가 연주를 멈춘 채였다. 이 침묵이 얼마나 이어질지, 그리고 이 정적이 깨지고 나면 무슨 말들이 쏟아져 나올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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