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녀 뒷수습이 내 몫이라니

2화

쏟아져 들어온 기억은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했다. 야근에 절어 살던 회사원, 마흔을 코앞에 두고도 결혼도 못 하고 사원증만 목에 걸고 다니던 여자. 매일 지하철에서 웹소설 앱을 켜놓고 출퇴근하던, 이름도 흐릿해진 전생의 나였다. 커피믹스를 하루에 세 봉씩 타 마시며 야근을 버텼고, 상사가 던진 서류를 주워 담으며 속으로만 육두문자를 삼켰던 그 삶. 지금 생각하면 참 처량했는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이게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도 헷갈렸다. 이게 무슨 개연성인가 싶었지만, 개연성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사고였다. 퇴근길 어느 골목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트럭에 치였고, 그다음 순간 나는 이 몸, 대현 왕국 제1왕녀 이서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 처음엔 그저 꿈인가 싶어 몇 날 며칠을 흘려보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고, 나는 어린 나이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냥 병약하다는 설정에 스스로를 숨겼다. 어린 왕녀가 갑자기 어른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이 될 테니, 나는 그저 조용히, 조용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지내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병약한 왕녀로,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방금 스쳐 지나간 기억 속에서, 나는 뭔가를 명확히 봤다. 낡은 태블릿 화면. 손가락으로 넘기던 웹소설 페이지. 화면 위에서 반짝이던 알림창, 다음 화 결제 버튼. 그리고 그 소설의 제목이, 표지에 적힌 '악녀의 나라'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 글자를 다시 곱씹었다. 악녀의, 나라. 그래, 분명 봤던 제목이다. 그런데 왜 지금? 왜 하필 지금 이 기억이 되살아난 건가. "왕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미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의 촛농 무늬를 다시 세었다. 스물세 개. 여전히 스물세 개였다. 나는 그 사실에 어쩐지 안도했다. 뭐라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는 게 이 상황에서는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촛농 자국은 그대로구나. 이런 걸로 위안을 삼는 내가 좀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붙잡을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괜찮아.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야." 나는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머릿속이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 세계가 소설이라니. 그것도 내가 읽었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어느 지하철 안에서 스크롤을 넘기던 그 소설의 세계라니.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상황 자체가 개연성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나는 미연이 내미는 물을 받아 마시며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감췄다.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조금 더 누워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니, 됐어. 그냥… 혼자 좀 있고 싶어." 미연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문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닉에 빠져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전생에서도 회사 회의 중 갑자기 서버가 터졌을 때 배운 교훈이었다. 그때도 소리 지르는 대신 침착하게 로그부터 뒤졌었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그날 밤, 나는 미연을 물리고 홀로 앉아 기억을 조금씩 짜맞췄다. 촛불 하나만 켜놓은 방 안에서, 나는 눈을 감고 억지로 기억의 서랍을 뒤졌다. '악녀의 나라'라는 소설의 스토리 라인이 완전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몇 가지 조각은 명확했다. 제1왕자 강태윤. 그는 후궁의 소생으로 우매하고 충동적이며, 남작영애 한미래에게 완전히 미쳐 있는 인물이었다. 한미래는 소설 속 여주인공, 여리고 눈물 많은 인상으로 주변 남자들의 보호욕을 자극하는 캐릭터였고. 그리고 공작영애 윤소하. 그녀는 내가 알기로 이 소설 속에서 강태윤과 혼약한 상태였다가, 어느 시점에 한미래를 괴롭혔다는 오해로 낙인찍혀 파혼당하고 몰락하는 '악녀' 역할이었다. 이 정도 조각들을 맞추고 나니 소설의 얼개는 뻔했다. 순애보 로맨스에 흔히 붙는 클리셰들. 여주인공은 착하고 가난하고 예쁘고, 악녀는 지위 높고 도도하고 결국 몰락한다. 나는 그 뻔함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뻔한 클리셰라는 건, 결국 그 안에서 벌어질 사건들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내가 그 예측 범위 안에 있느냐, 아니면 완전히 바깥에 있느냐였다. 나는 이 정도만 기억나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 왕국이 결국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게 단순한 로맨스물이 아니라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정치극이라는 것, 그리고 내 캐릭터가 그 소설에서 거의 언급조차 없던 조연이었다는 것이었다. 조연. 나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헛웃음이 나왔다. 존재감도 없는 조연으로 살다가 트럭에 치여 죽고, 소설 속 조연으로 다시 태어난 건가. 이런 게 회귀 서사에서 흔히 말하는 '2회차 인생'인가 싶었지만, 나는 회귀한 게 아니라 그냥 전생의 기억을 뒤늦게 되찾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애매한 위치에서. 솔직히 말해 조연이라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주인공은 온갖 사건의 중심에 서서 칼받이가 되고 음모의 표적이 되지만, 조연은 대체로 배경처럼 흘러가다가 조용히 퇴장한다. 나는 그 조용한 퇴장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이 소설이 정치극이라면 배경 취급받던 조연도 어느 순간 갑자기 칼바람 부는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다는 거였다. 왕위 계승권 다툼에 왕녀라는 신분으로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다음 날, 나는 미연을 불러 조심스레 물었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이치고, 시녀들이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는 애써 나른한 목소리를 꾸며 물었다. "미연, 요즘 강태윤 오라버니 소식은 좀 아는가." 미연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평소처럼 담담하게 답했다. "제1왕자 전하께서는 요즘 남작가의 한미래 영애님과 자주 어울리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공작영애 윤소하 님과는 혼약이 되어 있으신데도 말입니다." 나는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소설의 설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였다. 내가 읽었던 그 소설이, 내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의 정체였다. 손끝이 저릿하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게 확신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반갑지 않은 확신. "그런 이야기를 자세히 좀 더 들려줄 수 있겠나. 궁 안 소문이라도 상관없네." 미연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왕녀가 갑자기 정치적 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왕녀님, 갑자기 그런 걸 왜 여쭈시는지요." 나는 순간 말을 고르며 표면적으로는 태연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아, 이 질문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진땀이 났다. 몇 년째 병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척 살아온 내가, 갑자기 왕궁 내 소문을 캐묻는 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어설프게 둘러대다가 되레 의심을 사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냥, 몸이 좋지 않아 방에만 있으니 궁 안 소식이 궁금해서 그러네. 심심풀이라고 생각해주게." 미연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아무리 사소한 질문이라도, 이제부터 내가 던지는 모든 말이 남들 눈에는 갑자기 달라진 왕녀의 이상한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미연이 방을 나선 뒤에도 나는 한참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궁녀들이 오가고, 저 멀리 정원에서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그 평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강태윤과 한미래, 그리고 윤소하. 이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하면, 왕궁 전체가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였다. 그리고 나는, 소설 속에서 존재감조차 없던 조연 이서연은,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이 삶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걸 이렇게 조심스럽게 캐물어야 할지, 나는 그날 밤 잠을 설치며 앞날을 헤아렸다. 촛불이 다 타서 꺼질 때까지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스물세 개의 촛농 무늬를 다시 세어보면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이야기가 정말 내가 읽었던 그 소설이라면, 내가 아는 뻔한 클리셰들이 그대로 흘러갈 거라면 —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대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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