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쪼르륵.
측정관이 내 손목 위로 성수를 흘려보냈다.
투명한 액체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서늘했다. 성수 특유의 향, 라벤더 비슷한 그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에도 나는 웃고 있었다. 삼 년을 기다린 순간이었으니까.
왕궁 대연회장,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이런 자리였다. 열여덟이 되는 왕가 방계 영애들이 성년식 삼아 마력을 공식적으로 측정받는 자리. 다이아몬드 수저까진 못 돼도 그럭저럭 은수저는 되는 청하 서가의 장녀로서,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삼 년을 준비했다. 마력 감응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매일 새벽 눈 비비고 일어나 명상하듯 정신을 가라앉히는 짓을 했고, 마력친화력을 높여준다는 온갖 영약도 사 먹었다. 로판에서나 나오는 그 흔한 '마력 폭주형 히든 각성'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남들만큼만 나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삼 년 만에 망했다.
측정석 위에 떠오른 숫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0.
“……0이라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부채로 입을 가리는 소리, 옆 사람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소리, 그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나는 그 소리들 속에서 내 심장이 쥐어짜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건 그냥 내 착각이었을 거다. 심장에 청각기관이 있을 리가.
“측정관, 오작동 아닌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다급하고, 동시에 나를 향한 시선엔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딸이 아니라 하자 있는 물건을 보는 눈빛. 스스로도 감추지 못한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오작동이 아니라는 걸.
측정관이 성수를 다시 부었다. 쪼르륵, 소리만 똑같이 반복됐다.
0.
또 0.
세 번째도 0.
측정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 사람도 이런 결과는 처음 보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처음 봤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숫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세 번 다 같은 값이 나왔습니다. 마력 없음, 확정입니다.”
박수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애매한 침묵이 연회장을 뒤덮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누군가 비웃어줬다면, 차라리 화라도 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었을까. 개복치처럼 유리몸으로 살아온 인생, 이번엔 아예 존재 자체가 유리로 판명된 셈이었다. 마력 없는 귀족. 이 나라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교계에서의 사망 선고, 딱 그거였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들이 하나씩 귀에 박혔다.
“서가 장녀가 저럴 줄은…….”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좀 약해 보이지 않았어?”
“쯔쯔, 저 나이에 저러면 어떡하나.”
나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으니까.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건 또 얼마나 웃긴 그림이 될까.
그때, 연회장 안쪽 상석에서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헌 왕자였다.
금발에 푸른 눈, 왕가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미남자. 내 약혼자였다. 정확히는, 약혼자였던. 삼 년 전 이 자리에서 정혼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완벽한 짝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가의 장녀와 왕가의 이왕자. 그림 같은 조합이라고. 나도 그 말을 믿었다. 순진하게도.
“이 자리에서 밝히겠소.”
그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낮고 담담한,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 특유의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마력 측정보다 더 잔인할 거라는 걸.
“서은우 영애와의 약혼을 파기하겠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을 텐데, 내 감각만 유독 그 순간에 붙박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서은채 영애와 새로이 약혼을 발표하고자 하오.”
어디선가 서은채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청각은 신뢰도가 바닥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 소리가 진짜였는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청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헌을 바라봤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 옆,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은채를 보고 있었다. 밀색 머리에 벚꽃이 연상되는 얼굴. 나와 닮았지만 나보다 늘 한 뼘씩 더 예뻤던 동생.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같은 부모 밑에서 났는데도 사람들은 늘 은채를 먼저 봤다. 나는 그다음, 곁다리처럼 언급됐다.
“…….”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축하한다고? 그럴 리가.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감정보다 먼저 찾아온 건 허탈함이었다. 웃기지도 않게, 머릿속에는 “아, 오늘 아침에 은채가 유난히 신경 써서 화장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에 그런 게 궁금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구나.
마력이 없다는 것. 그게 이 나라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 나는 오늘 처음 제대로 체감했다. 파혼당하는 것도, 동생에게 약혼자를 빼앗기는 것도, 결국 전부 그 숫자 하나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은우 언니.”
은채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이 따뜻했다. 이상하게도 그 온기가 더 아팠다. 늘 나보다 체온이 높은 아이였다. 어릴 때 손잡고 정원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어이없이 그 순간에 겹쳐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몰랐다는 말, 그게 제일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그 순간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은채의 눈동자엔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는데, 그게 진짜 슬픔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어울리는 표정을 연습한 결과물인지, 나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축하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은 게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이 정도면 나도 연기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이런 재능은 마력 측정기로도 못 잴 텐데.
이헌이 그제야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엔 동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그냥 처리해야 할 안건을 하나 끝냈다는 시원함만 있었다. 삼 년 동안 나눈 대화, 함께 걸었던 정원, 그런 것들이 정말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미련을 가질 이유조차 없어졌으니까.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더는 이 사람들 앞에서 웃지 않겠다고.
연회장 밖으로 걸어나가는 내 뒤통수에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의 무게가 실제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끝난 무대에서 앙코르를 바랄 이유는 없었으니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탁, 탁. 그 소리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마차에 올라타서야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왕궁의 불빛들을 보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을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 왕궁 근위병들이 우리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무거운 소리였다. 그냥 방문객이 두드리는 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어제의 그 굴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이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