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괴물님, 제 손은 따뜻해요

3화

노인은 생각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백발에 깊게 팬 주름, 등은 조금 굽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나이는 못 속인다지만 저 눈빛만큼은 나이를 배신한 것 같았다. “서은우 영애십니까.” “……네.” “박씨라고 합니다. 이 성의 집사를 맡고 있습니다.” 간결한 자기소개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서며 주변을 둘러봤다. 성은 겉에서 본 것보다 안이 더 황폐했다. 벽 곳곳에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고, 복도 저편에서 찬바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차 안에서는 그렇게 안 추웠는데, 성문을 넘는 순간 체온이 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돈 지랄까진 아니어도 원래는 꽤 화려했을 성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기둥에 새겨진 문양이나 천장의 장식들, 다 뜯어놓기엔 아까운 것들인데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관리가 안 돼서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 마치 잘 나가던 회사가 부도난 뒤 사옥만 덩그러니 남은 느낌이랄까. “짐이 이게 전부입니까.” 박 노인이 내 손에 든 작은 가방을 보며 물었다. “네, 다예요.” “……그렇군요.” 노인의 눈빛에 잠깐 안타까움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동정이라면 필요 없었지만, 나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짐 가방 하나로 인생 요약될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노인은 나를 성 안쪽으로 안내했다. 걸음이 느렸지만 어딘가 절제된 태도였다. 오래 이곳에서 일한 사람 특유의, 급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걸음걸이였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나는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눈에 담았다. 먼지가 켜켜이 앉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었고, 아예 액자만 남고 그림은 뜯겨나간 자리도 있었다. 누가 뜯어갔는지, 아니면 스스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영애께서 하실 일은 성의 관리와 청소, 그리고…….” 노인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요?” “……주인님의 시중입니다.” 주인님. 그 단어를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마치 그 단어 자체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설한공, 한도윤 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는 왕궁에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전쟁에서 저주를 받아 괴물로 변한 공작. 반인반수의 형상이라고도 했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무서운 얘기도 있었다. 사교계 다과회에서 귀족 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대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설한공저에 배정된 시녀들은 오래 못 버틴다더라.”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실려 나온 애도 있대.” “진짜 사람 형상이 아니라던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이곳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 그 소문을 백 번은 곱씹었다. 곱씹을수록 살이 더 붙어서 나올 때쯤은 거의 전설급 괴담이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주인님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네?” “큰 소리를 내지 말고, 갑자기 다가가지 마시고, 그분의 몸에 손을 대지도 마십시오. 그것만 지켜주신다면 무사히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 경고의 무게만큼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노인의 목소리에 담긴 건 단순한 규칙 전달이 아니라, 뭐랄까, 경험에서 나온 절박함 같은 거였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다시 앞장서 걸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이 성이 왜 이렇게 텅 비어 있는지 물었다. “원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한때는 많았지요.” “지금은요?” “……저 혼자 남았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세월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캐묻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 성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직접 눈으로 봐야 할 것들이 더 많을 테니까. 걸음을 옮기는 동안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낮게 삐걱거렸다. 오래된 나무 특유의 소리, 사람이 밟지 않은 지 오래된 곳에서만 나는 그런 소리였다. 방은 성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다. 작지만 정갈했다. 침대에 낡은 이불이 깔려있었고, 창밖으로는 눈 덮인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촛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서랍장은 손잡이가 하나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방 안은 깨끗했다. 누군가 매일 청소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 노인 혼자서. “오늘은 쉬십시오.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노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관찰자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이 성 안에서 정말로 그게 가능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관찰자는 위험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지, 위험 한복판에 자원해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물론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왕궁에서의 삶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고, 이곳이라도 오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른 형태로, 훨씬 더 나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거다. 가방을 열어 짐을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봤자 옷 몇 벌과 손수건 한 장, 그게 다였다. 서랍에 옷을 넣고 나니 방은 더 텅 비어 보였다. 창밖 눈밭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눈가루를 흩날렸다. 흩날리는 눈가루 사이로 성벽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저 성벽 안쪽 어딘가에, 소문 속의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거겠지. 침대에 눕자 낡은 이불에서 옅은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오래 보관해뒀던 이불을 오늘 처음 꺼낸 모양이었다. 나를 위해서 준비해둔 걸까, 아니면 원래 이 방에 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낮 동안 봤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다. 텅 빈 복도, 뜯긴 초상화, 노인의 낮아진 목소리, 그리고 “자극하지 마십시오”라는 그 한마디. 자극하지 말라니.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 거야.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성 깊은 곳에서 낮게 울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오래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벽을 타고 울리는 것뿐인 것 같기도 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는 점점 내 방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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