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괴물님, 제 손은 따뜻해요

2화

재판정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소란스럽던 연회장과 달리 이곳은 낮은 목소리, 정제된 냉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등에 꽂혔다. 다들 나를 구경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마력 없는 왕가 방계 영애, 왕세자와 파혼당한 여자, 그리고 이제는 죄인. 명칭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판사석 중앙에 앉은 대법관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마력이 없는 왕가 방계 영애가 왕세자와의 약혼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왕실의 위신을 흔든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위신이라니, 내가 위신을 흔든 게 아니라 위신이 원래 그렇게 부실했던 거 아닐까. 애초에 마력 없는 영애를 약혼자로 들인 게 문제라면,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은 누구였더라. 나였나? 아니었지.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배짱은 없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 “게다가 왕가의 성수 측정 의식에서 세 번 연속 0의 값이 나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혈통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혈통 의혹. 그 말이 나오자 뒤편에 앉아있던 아버지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아버지가 나를 변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원래도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는 실낱같은 미련이 있었나 보다. 그 미련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변에 앉아있던 귀족들이 소곤거렸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귀에는 또렷하게 박혔다. “혈통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 “쉿, 여기서 그런 말을.” 들으라는 듯 흘리는 말들. 나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주워 삼켰다. 삼킬수록 목이 따가웠다. “청하 서가의 가주는 어찌 생각하시오?” 대법관이 물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입을 바라봤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왕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짧고, 건조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존재였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열여덟 해를 그 집 딸로 살았는데, 그 세월이 저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구나. 허탈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참았다. 판결은 빠르게 내려졌다. “서은우를 왕가의 수치로 규정하며, 북방 설한성으로 유배를 명한다. 그곳에서 종신 봉사형에 처한다.” 종신 봉사형이라니, 이름은 그럴싸했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설한성은 저주받은 괴물 설한공이 다스리는 곳, 그곳으로 간다는 건 사실상 사형 선고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방청석 어딘가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동정인지 구경거리를 즐기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마 둘 다였겠지. 나는 웃지 않았다. 이번엔 웃을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대법관의 서류가 착, 착,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도 저렇게 몇 장의 서류로 정리가 되는구나. 얇고, 가볍고, 순식간에. 그날 밤,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짐을 쌌다. 챙길 게 별로 없었다. 마력 없는 영애의 짐이란 원래 그렇게 가벼운 법이었다. 옷가지 몇 벌, 어릴 때 어머니가 남기고 간 낡은 목걸이 하나, 그리고 별 쓸모없는 손수건 몇 장. 그게 다였다. 방 안을 둘러보니 화려한 가구들, 값비싼 장식품들은 하나같이 내 것이 아니었다. 서은우라는 이름으로 채워진 방인데,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건 손수건 몇 장뿐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똑, 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은채가 서 있었다. “언니……” “왜 왔어.”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가워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냥, 사과라도 하고 싶어서. 나는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은채는 눈이 붉었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성수 측정 의식 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는……”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미 판결은 내려졌고, 아버지는 등을 돌렸고, 나는 짐을 싸고 있었다. 사과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됐어.” 나는 문을 닫았다. 더는 그 애의 눈물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문 너머로 은채가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대신 짐가방 손잡이를 꽉 쥐고 서서, 문에 등을 기댔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잠잠했다. 다음 날 아침, 마차에 실려 왕궁 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배웅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 하녀 하나가 창문 너머로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 하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눈물이 오늘 본 것 중 가장 진짜였다는 게 웃겼다. 마차가 흔들렸다. 덜컹, 덜컹.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길었다. 처음 하루는 익숙한 풍경이 지나갔다. 왕도 근교의 밀밭, 상인들이 오가는 관도, 낯익은 여관 간판들. 그런데 사흘째부터는 풍경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창밖 풍경이 초록에서 회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걸 지켜봤다. 마차 안 공기도 점점 차가워졌다. 호위병들이 덧옷을 걸치는 걸 보고서야 이게 진짜 유배라는 걸 실감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는 늘 뭔가를 두려워했다. 왕세자의 눈치, 아버지의 평가, 은채와의 비교, 마력 없는 것에 대한 손가락질.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다.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으니,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나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야.” 누구를 원망하지도,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남은 삶을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관찰자로 살겠다고. 그렇게 결심하는 것만이, 이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마차는 계속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점점 앙상해졌고, 눈은 점점 두꺼워졌다. 호위병 하나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한성이 가까워지니 다들 말이 없어지는군.” “당연하지. 저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까.”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마차가 멈춘 곳은 거대한 성문 앞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성벽은 마치 얼음으로 지은 무덤 같았다. 성벽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성문 자체는 검은 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표면에 서린 얼음이 마치 오래된 상처처럼 갈라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성벽 어딘가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뭔가가 안에서 신음하는 것처럼. 덜컹,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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