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괴물님, 제 손은 따뜻해요

5화

며칠 뒤, 나는 청소를 마치고 부엌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이 성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열흘 가까이 흘렀다. 처음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청소 순서 정도는 외웠다. 복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촛대는 손대지 말 것, 서재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 것. 박 노인이 알려준 규칙들은 단순했지만 그 이면엔 뭔가 무거운 게 깔려 있다는 걸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각, 성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낮에도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거대한 성이 밤이 되면 오죽할까.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정적이었다. 박 노인은 일찍 잠자리에 든 것 같았고, 복도의 촛불들도 절반쯤 꺼져 있었다. 나는 남은 촛불 몇 개에 의지해 부엌으로 향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는, 그런 하찮은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성 안쪽에서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내 안에서도 났다. 뒤이어 낮은 포효 같은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의 것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디쯤, 이성이 반쯤 무너진 존재가 낼 법한 소리였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섰다. 며칠 전 그 얼음 홀에서 봤던 존재가 떠올랐다. 한도윤. 이 성의 주인.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운, 그리고 아마도 사람이 아닌. 그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망쳐야 했다. 박 노인은 분명 자극하지 말라고 했다. 절대로, 라는 단어까지 붙여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자극이 아니라 이미 격발된 무언가였다. 애초에 내가 자극할 새도 없이 저 혼자 터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선 벌써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부엌까지 몇 걸음, 부엌에서 내 방까지 몇 걸음. 문을 잠글 수 있을까. 저런 존재한테 문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배신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머리와 굳어버린 다리가 완전히 따로 놀았다. 복도 끝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무거운, 짐승의 발걸음.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울리는 게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 거대한 형상이 복도 저편에서 튀어나왔다. 온몸을 뒤덮은 얼음 서리,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번엔 이성을 잃은 듯 흐릿했다. 전에 얼음 홀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적어도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의 저것은 그냥, 폭주하는 무언가였다. “……!” 나는 뒤로 물러났지만 등 뒤는 이미 벽이었다. 차가운 돌벽이 등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물리적인 냉기인지, 아니면 그냥 공포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망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딱 그 한 단어였다. 화려한 대책도, 마지막 유언도 아니고 그냥 망했다는 두 글자. 그가 팔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얼음 조각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나를 향해. 날카로운 것들이 촛불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저게 몸에 박히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 손을 붙잡았다. 맨손으로. 머리로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나중에 돌이켜봐도 왜 그랬는지 설명이 안 되는, 순전한 반사였다. 손끝에 닿은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살갗이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순식간에 손목까지 퍼졌다. 살이 타는 것 같은데 뜨거운 게 아니라 얼어서 타는 느낌이라니. 이상한 통증이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 손끝에서 무언가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따뜻한 것. 마치 몸속 어딘가에서 열기가 새어나가듯, 손바닥을 통해 그의 손으로 스며드는 감각이었다. 처음엔 그저 손이 데워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건 내 쪼끄만 체온이 아니라, 내 몸 안에서 뭔가가 흘러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한도윤의 몸이 순간 굳었다. 포효가 멈췄다. 거대한 형상 전체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했다. 방금 전까지 폭주하던 짐승이 그대로 화면 정지가 된 느낌이었다. 파랗던 눈동자가 흐릿하게 흔들리다가, 서서히 이성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초점을 맞춰가고 있었다. 마치 흐린 유리창에 낀 서리가 서서히 걷히는 것처럼. “……뭐지.”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그 다음 내 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분노인지 당혹인지, 나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전까지의 짐승 같은 눈빛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놓아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는 놓으라고 계속 외치고 있는데, 손가락이 말을 안 들었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 같았다. 손끝에서 뻗어나가던 온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게 뭔지, 나조차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마력 없는 몸. 왕궁에서 그렇게 낙인찍혔던 나였다. 쓸모없다고, 짐짝이라고, 그렇게 불려왔던 몸이었다. 그런데 그 몸에서 지금 뭔가가 흘러나가 저 폭주하던 존재를 멈춰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마력이 없다면서,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놓아라.” 한도윤이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그 손등 위에, 서리가 옅게 걷혀 있었다. 손등에 남은 그 흔적을 보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마치 뭔가를 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금……” 그가 나를 다시 바라봤다. 파란 눈동자에 이번엔 분명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네가 한 짓이냐.”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확인하려는 것 같은 어조였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뭐라고 대답한들 거짓말이 될 것 같았다.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박 노인이 촛불을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님! 영애님!” 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촛대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시선이 나와 한도윤 사이를 번갈아 오가는 순간, 나는 이 밤의 사건이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 온몸의 감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박 노인의 얼굴에 스친 그 표정. 그건 단순한 놀람이 아니었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아니, 뭔가가 들킬까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도윤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을 담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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