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붉은 눈이 세 개, 네 개, 다섯 개.
무너진 요새 잔해 사이로 마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것과 같은 형체였다. 늑대의 몸에 얼음 결정이 돋아난 짐승들.
나는 등을 벽에 붙인 채 숨을 골랐다.
'하나는 우연이었어. 다섯은... 감당할 수 있을까.'
손끝에서 냉기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 힘을 스스로 사용했다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마물이 다시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팔을 뻗었다. 별다른 계산 없이,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손끝에서 서리가 화살처럼 뻗어나갔다.
마물의 다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마물이 균형을 잃고 눈밭에 나동그라졌다.
'된다.'
'생각한 대로 나가는구나.'
나는 그 사실에 잠시 놀랐지만, 곧바로 다음 마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뒤로 몸을 굴리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순간, 눈밭 전체가 얇은 얼음판으로 뒤덮였다.
마물들의 발이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어나 가장 가까운 마물의 목에 냉기의 칼날을 꽂았다.
지지직.
마물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이내 유리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 정도면...'
하지만 안심할 틈은 없었다. 남은 세 마리가 동시에 나를 포위하듯 움직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계속 쓸수록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마력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전부 다 쓰면...'
'나중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을 거야.'
나는 순간, 이 힘을 완전히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힘의 존재가 알려지면, 왕국에서 도망친 것처럼 이곳에서도 쫓기는 신세가 될지 몰랐다.
나는 최소한의 힘으로, 정확한 타점만 노리기로 했다.
남은 세 마리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낮추고, 가장 먼저 도달한 마물의 앞다리를 얼려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몸을 발판 삼아 뛰어올라, 두 번째 마물의 목덜미에 얼음 조각을 박아 넣었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내 등 뒤로 뛰어올랐다.
나는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냉기가 창처럼 뻗어나가 마물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쿠구궁.
마물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 눈밭에 쓰러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이 힘을 써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서서히 실감으로 다가왔다.
'살았어.'
'정말로 살았어.'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요새 잔해의 무너진 벽 위에서, 나는 낮은 발소리를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큰 체형이었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짙은 남색이었고, 그 안에는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차분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는 마치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흥미롭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어딘가 우아한 결이 느껴졌다.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다시 냉기를 모으려 했지만, 이미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한 뒤였다. 손끝이 미약하게 떨릴 뿐, 더 이상의 마력은 응집되지 않았다.
'하필 이런 순간에...'
남자는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발밑의 눈이 그의 무게에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인간이 절대영도의 마력을 다루는 걸 본 건 처음이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게다가 그 마력, 완전히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사람, 대체 누구야.'
'용화제국 사람인가?'
그의 존재감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마물보다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름이 뭐지?"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선하은이라는 이름을 밝히는 순간, 추방된 공작가의 장녀라는 사실이 드러날 위험이 있었다.
나는 입술을 뗐다.
"……하은."
성을 뺀, 이름만.
남자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짙은 남색 눈동자가 마치 내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하은."
그가 그 이름을 나직이 곱씹었다.
"기억해두지."
그 말과 함께, 그는 로브를 휘날리며 돌아섰다.
"이 설원에서 오늘 밤 벌어진 일은, 곧 소문이 될 거다."
그가 등을 보인 채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소문이 어디까지 퍼질지는, 너의 선택에 달려 있겠지."
그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것이 방금 전 전투의 여파인지, 아니면 그 남자의 존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설원의 유령.'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소문이 퍼진다면, 나를 쫓는 눈들도 늘어날 것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마물들의 잔해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설원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