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버지가 서재로 나를 부른 건 저녁 식사가 끝난 직후였다.
식사 자리에서부터 이상한 낌새는 있었다. 아버지는 수프에 손도 대지 않았고, 하녀가 몇 번이나 접시를 치워도 되는지 물어야 했다.
서재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쥔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영지의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도 늘 침착했던 분이었다.
'서연아.'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어머니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주치의는 이미 다녀간 뒤였다. 그가 남기고 간 서류에는 병명이 길고 복잡하게 적혀 있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회복 불가능. 남은 시간은 알 수 없음.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이해가 되는 게 아니라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럴 리 없어.' 아버지가 서류를 구겼다. '재검을 받아야 해. 다른 의원을 불러야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실감했다. 이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열여섯 인생 중 가장 무력한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일이면 괜찮아질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날 이후 아버지는 서서히 무너졌다. 정확히는, 무너진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웠다. 그냥 멈춰버렸다.
처음 며칠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그런 소식을 들으면 잠시 무너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는 서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사도 방으로 들여야 했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 날이 늘었다.
영지 회계 서류는 서재 구석에 쌓여만 갔고, 소작인들의 청원서는 답장 없이 반송됐다. 집사가 매일 아침 결재를 청했지만 아버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직접 서재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문 아래로 빛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며칠만 더.'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며칠만 더 있으면 정신을 차릴 거다.'
며칠이 몇 주가 됐다.
그 몇 주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서재 문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매일 아침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학당으로 향했다.
첫째 언니 이지원은 이미 출가한 상태였고, 둘째 언니 이지수는 자기 앞가림에 바빴다.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늦었다. 막내 서은은 아직 열두 살, 병치레가 많은 아이였다.
그러니 남은 건 나였다.
*
사교 모임에 나간 건 순전히 예의상이었다. 어머니 대신 얼굴을 비추라는 아버지의 부탁 아닌 부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탁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서재 문을 닫았을 뿐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동정과 호기심이 반쯤 섞인 눈빛들.
연회장 한쪽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오태현. 내 혼약자.
'오 공자님이 요즘 그 아가씨한테 완전히 빠지셨다더라.' 누군가 소곤거렸다. '한지은이라던가.'
'혼약녀가 있으신데도?' 다른 목소리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이서연 양은 요즘 얼굴 볼 시간도 없다잖아. 집안일 때문에.'
나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동요는 없었다. 정확히는, 동요할 여유가 없었다.
오태현과의 혼약은 정략이었다. 처음부터 사랑 같은 건 없었다.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준다 해도, 나로서는 남편감이 하나 줄어드는 문제일 뿐이었다.
'차라리 잘됐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파혼이라도 하면 정략의 짐을 하나 덜어내는 셈이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운 걸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저 집 요즘 형편이 안 좋다며.' 부채 뒤에서 새어 나온 말이 정확히 내 귀에 꽂혔다. '자작님이 손을 놓으셨다던데.'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 저러시는지 몰라도, 참.' 또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영지 관리가 벌써 몇 달째 엉망이라던데. 소작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고.'
소문은 이미 사교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우리 가문의 붕괴가, 내가 알기도 전에 남들 입방아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서재에 직접 들어가야겠다고.
마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며 나는 계산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언제 다시 정신을 차릴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누군가는 영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사에게 서류를 넘겨받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아가씨가 직접… 하시겠다고요?' 집사가 되물었다. '이건 학업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알아요.' 나는 짧게 답했다.
'회계는 숫자만 보는 게 아닙니다. 소작인들의 사정도, 상단과의 거래도, 전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알아요.' 나는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게다가 자작님께서 아직 완전히…'
'그러니까 제가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집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끊었다. '아버지가 못 하시니까요.'
집사가 한숨을 쉬며 서류함 열쇠를 내밀었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과 안도가 반쯤 섞여 있었다.
'그럼 오늘 밤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당장이요.' 나는 열쇠를 받아 쥐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서재 문을 열었다. 먼지 쌓인 장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버지가 손도 대지 않은 서류 뭉치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몇 달치 결재가 밀려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나는 촛불을 하나 더 켜고 자리에 앉았다. 장부를 처음 펼쳐보는 것이었다. 회계라는 게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무언가가 억지로 뚫고 들어오려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어긋난 소리를 내며 맞춰지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억지로 열리는 것처럼.
나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낯섦 뒤에,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가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