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한 자작 당주

3화

채권자 명단을 정리하는 데만 나흘이 걸렸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는 처음엔 그저 종이 더미로 보였다. 하나씩 펼쳐 읽으며 이름과 금액, 이자율을 옮겨 적다 보니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초는 세 번이나 갈아 끼웠다. 밤을 새우고 나서야 겨우 전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소액이었다. 인근 상점에 진 잡화 빚, 하인들 월급이 밀려 쌓인 것들,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숫자들이었다. 그런데 몇 군데는 상황이 심각했다. 특히 오현 상단에서 빌린 돈은 이미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고 있었다. 숫자를 다시 짚어봤다. 틀린 게 아닌가 싶어서 세 번이나 계산했다. '이건 갚을 수 없는 구조예요.'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갚으라고 만든 조건이 아니야.' 전생의 기억 속에서 이런 계약을 뭐라고 부르는지 정확한 단어가 떠올랐다. 약탈적 대출. 담보를 잡고, 이자를 높게 매기고, 상환 조건을 교묘하게 꼬아 결국 상대가 원금을 갚지 못하고 자산을 통째로 넘기게 만드는 방식. 상대는 처음부터 우리가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악질이네.' 나는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이런 걸 알면서도 서명한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놀라운데.'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 아버지 상태로는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요즘도 밤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서재에 틀어박혀 계셨으니, 이 명단을 보여드리는 건 불에 기름을 붓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혼자 움직였다. 집사를 통해 오현 상단에 서신을 보냈다. 상환 일정을 재조정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 너무 저자세로 보이면 안 됐고, 너무 강경하게 나가면 그마저 협상 자체가 무산될 위험이 있었다. 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상단 측 대리인이 직접 찾아왔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온 대리인은 배가 나온 중년 남자였다. 옷차림은 화려했고, 시선은 방 안을 훑듯 움직였다. 값을 매기는 듯한 눈이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협상을 하시겠다고요?' 대리인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물었다. '실례지만, 자작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신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리인은 서류를 펼치며 조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자율은 그대로 두되 상환 기간만 늘려주겠다는, 사실상 나아진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마치 큰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했지만, 계산해보면 오히려 이자가 더 쌓이는 구조였다. '이 조건은 안 되겠네요.' 나는 서류를 밀어냈다. '그럼 어떤 조건을 원하십니까?' 대리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이자율 조정, 최소 절반까지.' 대리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가씨, 그건 상단 입장에서 손해입니다.' '그럼 원금도 못 받는 게 더 나은 선택인가요?'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이 집안이 망하면, 당신들 받을 돈도 사라져요.' 대리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대로면 삼 년 안에 우리 집안은 파산합니다. 파산하면 채권자들이 줄을 서겠죠. 그 줄에서 오현 상단이 몇 번째일지, 대리인님도 잘 아실 텐데요.' 침묵이 흘렀다. 대리인은 서류를 다시 살펴보는 척했지만, 실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본단에 물어봐야 합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세요. 하지만 오래 걸리면, 저는 다른 채권자들부터 정리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현 상단이 가장 큰 채권자였으니 다른 곳부터 정리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리인은 그 허점을 눈치채지 못한 듯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결국 그는 절반이 아닌 삼 할 인하로 협상을 마무리하고 돌아갔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집사가 그 장면을 지켜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어디서 이런 걸 배우셨습니까?' 목소리에 놀라움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평소 무뚝뚝하던 집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책에서요.' 나는 짧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책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집사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방을 나갔다. 아마 속으로는 백 가지 추측을 하고 있을 거였다. 어느 귀족 가문에서 몰래 상단 경영을 배웠다든가, 혹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비법서가 있다든가.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으니, 그냥 그런 오해 속에 놓아두는 편이 나았다. 밤이 되면 나는 혼자 방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계획이었다. 책상 위에 종이를 펼치고,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손끝이 차가웠다. '삼 년 안에 파산.' 나는 종이에 적었다. '그 전에 최소한의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안전망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세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미래를 계산하지 않았다. 결혼과 상속, 가문의 명예가 전부인 사람들 사이에서 '안전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명확해지는 기분도 있었다. 적어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집안에는 나 말고도 세 명의 자매가 있었다. 언니 둘, 그리고 병약한 막내 동생. 지수 언니는 성격이 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지원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가서 다른 상단 쪽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막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늘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그들 각각을 안전한 위치로 옮겨놓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산이라는 파도가 닥쳤을 때, 적어도 이 세 사람만큼은 휩쓸리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언니 지수에게 편지를 썼다. 최대한 담담한 문장으로, 그러나 행간에 상황의 심각성이 드러나도록 신경 써서 썼다. 지원 언니가 시집간 상단 쪽에도 따로 연락을 넣었다. 혹시 급하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면 미리 안면을 만들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하면서, 나는 이 모든 게 얼마나 성급한 계획인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급하지 않으면 늦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서 절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집사에게 건네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복도 끝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였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그것도 혼자서 걷고 계셨다.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설마 벌써 눈치채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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