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장부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졌다.
처음에는 두통이라고 생각했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뭔가가 쿵, 하고 부딪히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두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숫자, 계산, 그래프, 그리고 낯선 단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복리, 유동성, 부채 상환 스케줄. 내가 배운 적 없는 개념들이 마치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뭐지, 이게.'
손끝이 떨렸다. 장부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저릿했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함께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생. 한국이라는 나라. 회사원이었던, 아니 정확히는 회사원인 척 살면서 밤마다 회귀물과 재벌물 웹소설을 읽던 여자의 기억이었다.
기억 속에서 그 여자는 매일 아침 지옥철에 시달렸고, 매달 카드값에 시달렸고, 그러면서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소설을 읽었다. 회귀, 환생, 대체역사. 장르는 늘 비슷했다.
'이거 완전 회귀물 클리셰잖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심각한 상황인데 튀어나온 첫 반응이 이거라니, 전생의 습관이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주인공이 갑자기 기억을 되찾고, 몰락해가는 가문을 살린다. 몇 번을 봤더라.'
세는 것도 우스울 만큼 많이 봤다. 그런데 그게 진짜 나한테 일어날 줄은 몰랐지.
하지만 곧 웃음이 멎었다. 눈앞의 장부가 웃을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의 세수는 지난 삼 년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소작료 감면이 매년 반복됐고, 그 이유는 명확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들이었다. 흉작이 있던 해도 있었고, 그냥 담당자가 소작인들의 사정을 봐준다는 명분으로 임의로 깎아준 해도 있었다.
문제는 그 감면이 다음 해로, 또 다음 해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한 번 깎아준 세율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반면 지출은 늘어났다. 아버지 대신 결재하던 사람이 없어서 오래된 계약들이 자동 갱신되며 불리한 조건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상단과의 물류 계약, 창고 임대 계약, 인부들의 고용 계약까지. 하나같이 몇 년 전 시세로 묶여 갱신되고 있었는데, 정작 시장의 물가는 그새 두 배 가까이 뛰어 있었다.
'이대로면.'
나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어가며 계산했다. 전생의 기억 속 스프레드시트 감각이 그대로 손끝에 남아 있었다. 열과 행을 나누고, 증감율을 따지고, 손실이 누적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그 감각이었다.
세수 감소율, 지출 증가율, 그리고 남아있는 자산. 세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 답은 하나로 좁혀졌다.
'이대로면 삼 년 안에 파산이다.'
삼 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문제는 그 삼 년 동안 이 집안을 이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서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적어도 내가 눈을 뜨고 이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계속 그랬다. 하루 대부분을 서재 안에서 보내며, 결재해야 할 서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쌓아두기만 했다.
어머니는 병상에 있었다. 몇 달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의원들은 매번 다른 진단을 내렸지만 나아지는 기색은 없었다.
언니들은 각자의 삶이 있었다. 큰언니는 이미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는 사교계에 정신이 팔려 집안 사정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남은 건 나였다.
'이런 전개 진짜 많이 봤는데.' 나는 장부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보통 이럴 때 주인공이 갑자기 사업 수완을 발휘하지. 무슨 신묘한 상품을 개발하거나, 숨겨둔 인맥을 동원하거나.'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게 사업 수완이 아니라 웹소설 오백 편쯤 읽은 잡지식뿐이라는 거였다.
그것도 정확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는 대충 이렇게 흘러가더라' 하는 감이었다. 실무 경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회사에서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어본 적도, 회계 프로그램을 다뤄본 적도 없는 채로 그저 남의 이야기를 소비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뭘 해야 하는지, 뭘 하면 안 되는지는 구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계약들이 왜 잘못됐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서재에 앉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눈두덩이 뻑뻑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했다.
집사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가씨, 이 시간에 벌써 와 계셨습니까.' 그는 문틀에 서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열여섯 살 아가씨가 새벽부터 서재에 나와 있는 모습이 낯설었을 것이다.
'어제 못 다 보신 서류가…' 집사가 말끝을 흐렸다.
'가져오세요.' 나는 짧게 답했다.
'전부 다 말입니까?'
'전부요.'
집사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의아함과 조심스러움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열여섯 살 소녀가 던지는 말에 어른의 무게가 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건 아니시죠? 어제 서재에서 오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서류 가져오세요.'
그는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가 서류를 가져오는 사이,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미래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정신병자로 취급받을 게 뻔했다. 아니, 정신병자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사교라거나 저주라는 단어가 먼저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그러니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갑자기 철이 든 딸처럼, 갑자기 집안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소녀처럼 보여야 했다.
집사가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어제보다 두꺼운 뭉치였다.
'이건 어제 다 못 정리한 계약서들과, 채권 관련 서류들입니다.'
'채권요?'
'네. 몇 해 전부터 빌리신 자금이 있는데, 아직 상환이 끝나지 않은 걸로…'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서늘해졌다.
그중 맨 위 종이에 적힌 채권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상단 이름이었다. 처음 보는 이름인데도 어쩐지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액수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나는 그 종이를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집사님.'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라앉히며 물었다. '이 상단, 아세요?'
집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건…' 그가 말을 고르는 사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침묵이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