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한 자작 당주

4화

지원 언니는 얼마 전 한도상회 당주 한도윤과 혼인했다. 작위 없는 상인이었지만 한성에서 가장 큰 상단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 혼사가 결정됐을 때, 사교계는 수군거렸다. 자작가의 장녀가 작위도 없는 상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이 자작가 영애가 장사꾼한테 시집을 간다니.' 뒷말들이 무성했다. 나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웃었다. 그들이 뭘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혼사를 은근히 밀어붙였다. 정확히는, 아버지 몰래 지원 언니와 한도윤 두 사람이 자주 마주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앞으로 이 가문이 살아남으려면 돈줄이 필요했다. 작위보다 현금이 급한 시기가 올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야, 서연아?' 당시 지원 언니가 물었을 때,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전생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한도윤은 처음엔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자작가의 셋째딸이 뭘 알겠냐는 눈빛이었다. '혼담이 오가는 걸 알고 있으니, 조건을 정리해두는 게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아마 그 순간부터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을 거다. 지원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자 답장은 하루 만에 도착했다. '서연아, 무슨 일이야? 갑자기 도움이 필요하다니.' 언니의 필체는 여전히 단정했다. 급하게 쓴 것 같은데도 글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의 상태, 채권자들,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자금 규모까지. 숫자를 하나씩 적어 내려가면서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지원 언니는 답장 대신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한도윤도 함께였다. 마차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안심이 됐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한도윤이 장부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보다 계산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종이를 넘길 때마다 손끝으로 숫자를 짚었다. 상인다운 습관이었다. '여기, 이 채권은 이자가 왜 이렇게 높죠?' 그가 물었다. '급하게 빌린 거예요. 아버지가 알아보지도 않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나는 곧바로 물었다. 돌려 말할 여유가 없었다. '조건이 있어야겠지.' 한도윤이 담담하게 답했다. '이건 자선이 아니니까.' '당연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 말씀하세요.' 그는 지분과 향후 거래 우선권을 조건으로 걸었다. 나는 잠시 계산한 뒤 받아들였다. 지금은 자존심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이 정도면 우리 상단 쪽에서도 손해는 아니야.' 한도윤이 지원 언니를 향해 말했다. 그 말투에 언니는 옅게 웃었다. 지원 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짧게 웃었다. 그게 진심에 가장 가까운 말이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뒤, 한도윤이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셋째 아가씨는 원래 이런 일을 하던 사람 같군요.'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둘째 언니 지수는 다른 방식으로 도왔다. 그녀는 원래 수도의 재봉 공방에서 일하고 싶어했지만, 집안 눈치 때문에 미뤄두고 있었다. 지수 언니는 늘 방 한구석에서 옷감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끝이 얼마나 능숙한지, 어머니도 인정했을 정도였다. 나는 그녀를 직접 공방으로 보냈다. '언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독립해. 대신 우리 영지 옷감 발주는 언니 쪽으로 몰아줄게.' 지수 언니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줘?' '언니가 잘돼야 나도 편하니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진짜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계산이었다. 재봉 공방에서 나오는 수익이, 훗날 영지 재정에 작은 보탬이 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수 언니는 짐을 싸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진짜 괜찮은 거지?' '괜찮으니까 가.' 나는 등을 밀었다. 막내 서은은 몸이 약해 방 밖으로 잘 나오지 못했다. 나는 매일 저녁 그녀 방에 들러 약초를 달여줬다. 전생의 기억 속에 있던 간단한 건강 상식들이 의외로 도움이 됐다. 열이 오를 때 어떤 풀을 써야 하는지, 기침이 심할 때 어떤 걸 피해야 하는지. '언니, 이거 또 이상한 거 가져왔어?' 서은이 코를 막으며 물었다. '몸에 좋은 거야.' 나는 대충 웃어넘겼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그거 마시고 배 아팠단 말이야!' 서은이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다. '그건 양을 잘못 잰 거고, 이번엔 제대로 했어.' 나는 그릇을 건넸다. 서은은 못 미더워하면서도 결국 다 마셨다. 그날 이후 열이 조금씩 내려갔다. '언니는 어디서 이런 걸 다 배운 거야?' 서은이 이불 속에서 물었다. '책에서.' 나는 짧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책이 이 세상에 없는 책이라는 것뿐. 이 모든 일들이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될지, 그때는 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언니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놓고, 채권자들과 씨름하고,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는 것. 그게 내 일상이었다. '이러다 나도 병나겠다.' 나는 종종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은의 방을 나서던 그날 밤, 복도에서 하녀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오는 걸 봤다. 발소리부터 이상했다. 평소라면 조심스럽게 걷던 하녀가, 그날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마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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