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아침이 되자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저렸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들이 이불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죽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그릇에서 올라오는 흰 김이 방 안의 차가운 공기를 살짝 데웠다.
"먹어."
그는 그릇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릇을 든 손길에는 이상하게도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환자를 다루는 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칠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릇을 내려놓을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근거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릇을 받아 들었다.
숟가락을 쥔 손이 여전히 떨렸다.
죽은 묽었고, 간도 거의 되어 있지 않았지만, 위장이 뒤틀릴 만큼 절실하게 반가운 냄새였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알고 있어."
그가 무심하게 답했다.
"먼저 알려줄 게 있어. 넌 죽었어."
숟가락이 그릇 안에서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국경 절벽에서 추락사한 걸로 처리됐어. 왕궁에서 발표했지. 성녀 이서연, 마수에게 쫓기다 죽음."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사실은 담담하지 않았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죽었다.'
한 줄로 정리된 나의 최후였다.
왕궁의 발표문이 어떤 문장으로 적혔을지,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보았다.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서 무언가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었다.
"잘됐군요."
"뭐?"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죽은 사람은 감시받지 않으니까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시 죽이려 들 겁니다."
남자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보라색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경멸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게 불편했지만,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피하면, 약한 쪽으로 보일 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대등한 취급이었다.
"이름을 바꿔야겠지."
그가 말했다.
"이서연은 죽었으니까, 다른 사람으로 살아."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다른 사람으로 산다.'
원래도 나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적이 많았다.
언니 서인의 대리로 사교계에 나설 때마다, 나는 이서연이 아니라 이서인이었다.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들고, 언니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누구의 대리도 아닌, 오직 나만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낯선 이름이지만, 처음으로 온전히 내 것이 될 이름이었다.
"유하연."
입 밖으로 낸 순간, 그 이름이 낯설게 울렸다.
발음이 입안에서 겉돌았다.
몇 번 더 되뇌면 익숙해지려나.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도 반대도 아닌, 그저 확인의 의미였다.
"여기는 어딥니까."
"국경 지대, 적하촌 인근이야. 왕궁 손이 미치지 않는 곳."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질문이 많군."
그는 대답을 피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모습이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목구비는 뚜렷했지만, 그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대답할 마음이 없다.'
나는 그렇게 결론짓고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목적보다 내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궁금한 것은 산더미였지만, 한 번에 모든 것을 캐물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궁 소식은 들어옵니까."
"가끔."
"강태윤은요. 이서인은."
그 이름들을 입에 담는 순간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혀끝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솟아 목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약혼 발표를 준비 중이라던데."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예상했던 결과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그들의 눈빛에서 이미 읽어냈던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확인하는 것과 짐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였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배신과,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배신은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언제 발표합니까."
"몰라. 소문만 도는 단계니까."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가슴 안쪽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그 소식을 삼키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저를 마을로 데려가주십시오."
"왜."
"정세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어디까지 손을 뻗었는지."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창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가 멀어졌다.
"몸이 나으면."
짧은 대답이었지만, 거절은 아니었다.
나는 그 대답에서 작은 여지를 읽어냈다.
'이 남자는 나를 이용할 생각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돕고 싶은 걸까.'
말투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행동에는 분명한 배려가 섞여 있었다.
그 간극이 그를 더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상관없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나를 배신한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 결심만이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남은 죽을 천천히 비웠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미미한 온기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날 밤, 나는 손바닥의 흐릿한 빛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방 안의 촛불이 꺼진 뒤에도, 손바닥 위의 빛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마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끝을 조금 움직여 보니, 익숙한 흐름이 느껴졌다.
한때는 온 왕국이 떠받들던 힘이었다.
이제는 그 힘을 함부로 드러내는 순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거짓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함부로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손을 이불 속으로 감췄다.
이 방 안에서조차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다시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