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몸이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해지기까지 열흘이 걸렸다.
그 열흘 동안 나는 침상에 누워 천장의 나뭇결만 세고 있었다.
낡은 통나무집이었다.
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올 때마다 촛불이 흔들렸고, 그 그림자가 벽에 이상한 모양을 그려냈다.
남자는 그동안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다.
식사를 가져다줄 때도, 상처에 약을 발라줄 때도, 그는 필요한 말만 짧게 던지고 사라졌다.
"움직이지 마."
"먹어."
"자."
명령형 세 마디가 그가 나에게 건넨 말의 거의 전부였다.
나는 속으로 그를 부를 이름을 정했다.
'까마귀.'
검은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꼭 날개를 접은 까마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뒷짐을 지고 문가에 서 있을 때는, 정말로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본인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괜히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열흘째 되는 날, 나는 처음으로 은신처 밖으로 나섰다.
문턱을 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벽을 짚어야 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구나.'
그래도 더는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국경의 바람은 왕도의 바람과 달랐다.
건조하고 거칠어서, 살갗을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다.
왕도에서는 정원의 꽃향기와 향유 냄새가 섞인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지만, 이곳의 바람에는 흙과 마른 풀, 그리고 희미한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맥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었다.
그 산맥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저 그림자가 이 마을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이후에 알게 될 것이었다.
"저곳이 적하촌입니다."
까마귀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지붕들이 낮게 엎드린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연기가 몇 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겉모습을 믿지 않기로 했다.
마왕 토벌 당시에도, 겉으로 평화로운 진영 안에 배신자가 숨어 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한쪽이 다시 타올랐다.
마왕의 심장을 봉인하던 그 순간, 신성력을 쏟아붓느라 손끝이 하얗게 타버렸던 기억.
그 옆에서 강태윤은 검을 치켜들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쓰러진 그 순간에도,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동료들의 환호성 속에서, 오직 나만이 바닥에 쓰러진 채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등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배신자에게는 오로지 대가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기억을 밀어 넣었다.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마을에 들어가면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까."
"신성 마력은 절대 드러내지 마."
까마귀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이 근방에도 왕궁 첩자가 돌아다닐 수 있어."
"왜 국경까지 첩자를 보냅니까."
"성녀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고 해서,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궁이 그렇게까지 의심이 많던가.'
곱씹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의 죽음은 그들에게도 손해였을 테니까, 확인하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마을의 풍경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지붕은 대부분 낡은 초가였고, 벽에는 마수의 발톱 자국처럼 보이는 흠집이 여럿 남아 있었다.
어떤 벽에는 그 흠집을 나무판자로 덧대어 막아놓은 흔적도 있었다.
우물가에 모인 아낙들의 옷은 해져 있었지만, 바느질한 자국을 보면 정성껏 손질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같은 색 실이 없어 다른 색 실로 기운 부분도 여럿 보였다.
'가난하지만 생활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관찰만으로도 이 마을이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국경 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도의 화려한 성벽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돌 하나, 나무 하나까지 다듬어진 왕도의 거리와 달리, 이곳의 길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발밑에서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이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까마귀 나리, 오늘은 손님을 데려오셨습니까."
노인이 까마귀를 그렇게 불렀다.
'설마 나만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었나.'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이 남자의 정체를 알 리 없는 마을 사람들조차 그를 까마귀라 부르고 있었다니, 내 관찰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까마귀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였다.
"제 이름은 유하연입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빛이었다.
"약초를 좀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고 들었소만."
까마귀가 미리 그렇게 말을 흘려둔 모양이었다.
'치유 능력을 약초 지식으로 위장할 셈이군.'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신성력으로 상처를 낫게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약초로 그럭저럭 효과를 낸 것처럼 꾸미는 쪽이 훨씬 안전했다.
"네, 조금 다룹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신경 썼다.
노인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요즘 마을에 마수가 자주 출몰해서, 다친 사람이 많소."
그 말에 마을 여기저기서 낮은 신음이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벼락 아래 앉아 있는 아이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지붕 밑에서 나온 여인의 다리를 절뚝이는 것도 보였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남자의 손등에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곳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국경 지대를 방치한 왕궁의 무능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왕도의 귀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연회를 열고,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나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빛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힘을 완전히 숨긴 채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려 해도, 이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눈앞에서 외면하는 건 다른 의미로 나를 죽이는 일이었다.
"저 아이를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약초로 그게 되겠소?"
노인의 목소리에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마수에게 당한 상처가 약초 몇 뿌리로 나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해볼 만큼 해보겠습니다."
나는 아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까마귀가 뒤에서 낮게 경고했다.
"너무 눈에 띄면 안 돼."
낮지만 분명한 경고였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라기보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내가 위험해지면, 저 남자의 계획도 어긋난다는 뜻이겠지.'
굳이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목소리가 조금은 신경 쓰였다.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이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였다.
흙투성이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파써……"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음이 뭉개진 그 말투에 나는 잠시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아이의 팔에 감긴 붕대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마수의 발톱에 긁힌 상처였다.
붕대 색깔로 보아 갈아준 지 벌써 며칠은 지난 듯했다.
나는 붕대를 살짝 걷어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붉은 살이 드러난 부위 주변으로 열이 오른 듯 피부가 부어 있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낯선 설렘이었다.
'이 상처, 방치하면 곧 곪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판단이 섰다.
지금 당장 손을 대야 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내 목소리가 아이를 안심시켰는지, 울먹이던 아이의 입술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때, 등 뒤에서 까마귀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연."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는 뭔가 다른 기색이 섞여 있었다.
경고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