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자님, 배신은 늦으셨어요

3화

쪼르륵.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침 식탁 위엔 갓 구운 빵과 수프,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함께 놓여 있었다. "서아야."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용건은 언제나 뻔했다. "오늘 리아 옷 좀 다시 손봐줄 수 있니. 태오 도련님이 온다니까 예쁘게 입혀야지." 또 시작이었다. 숟가락을 들다 말고 잠시 멈췄다. 수프 표면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그냥 텅 빈 얼굴. 어릴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리아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리아 곁을 지켰고, 리아가 예쁜 옷을 원하면 내가 그 옷을 만들었다. 여덟 살 때 처음으로 리아의 인형 옷을 만들어준 게 시작이었다. 조그만 헝겊 조각을 이어붙여서 인형에게 입혀주던 그날, 리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때는 순수하게 좋아서 했다. 동생이 웃는 게 좋았고, 부모님이 칭찬해주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그 칭찬은 언제나 리아를 향한 것이었다. "우리 리아, 언니가 이렇게 잘해주다니 복도 많지." 나에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정확히는, 있긴 했다. "서아도 참 착하네" 정도의, 지나가는 말로 던져지는 그런 것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예의상 붙이는 꼬리표 같은 말. 열두 살 무렵, 생일 선물로 받은 목걸이를 리아가 갑자기 갖고 싶다고 조르자, 아버지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걸 벗겨 리아 목에 걸어줬다. "네 언니는 다 컸잖니. 리아는 아직 어리고." 두 살 차이였다. 두 살. 그 두 살이라는 숫자가 마법의 단어처럼 모든 걸 정당화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가야 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옷, 장신구, 방, 시간, 관심. 전부. 열다섯 살엔 내 방이 더 좋다고 리아가 울며 조르자 방을 바꿔줘야 했다. 열일곱 살엔 내가 아끼던 자수 책까지 넘겨줬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늘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투로 나를 타일렀다. "네가 언니잖니."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됐다. 그리고 이제는 약혼자까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직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안 분위기를 보면,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태오가 온다는 소식에 리아의 옷을 다시 손봐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저 말투부터가, 이미 답을 정해놓은 것처럼 들렸다. "알겠어요, 어머니." 나는 그렁그렁하지도 않은 눈으로 대답했다. 이제는 눈물이 나올 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예전엔 이런 말을 들으면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는데, 지금은 그냥, 아, 또구나. 그 정도의 반응만 남았다.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는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리아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 리아는 침대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리본을 이것저것 대보고 있었다. 화사한 연분홍빛 리본이 리아의 검은 머리칼에 걸쳐질 때마다, 방 안이 온통 반짝이는 것 같았다. "언니, 이 리본 색깔 어때요? 태오 오라버니가 좋아하실까요?" "옷이나 봐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이미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옷장을 열어 리아의 드레스를 꺼내 살폈다. 소매 끝이 약간 풀려 있었다. 바늘과 실을 챙기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근데 언니, 요즘 좀 이상해요. 왜 그렇게 조용해요?" 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 그 순수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냥. 요즘 좀 피곤해서." "헤에. 언니는 진짜 튼튼해서 좋겠다. 나는 조금만 무리해도 앓아누워버리는데." 웃으며 하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늘 끝이 손끝을 살짝 찔렀다.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팠는데, 그보다 더 아픈 게 있어서 이 정도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 리본 색깔, 언니 생각은 어때요?" "둘 다 잘 어울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만 골라줘요." "...연분홍색." "오, 역시! 나도 그게 좋을 거 같았어." 리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리본을 다시 머리에 갖다 댔다.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보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겠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적이 없었을 테니까. 바늘질을 하는 동안 리아는 계속 재잘거렸다. 태오가 어떤 사람인지, 오늘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예쁘게 보일지. 나는 그 말들을 듣는 척하며 소매를 꿰맸다. 실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도 함께 팽팽해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다 손봐준 뒤, 방을 나섰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리아는 거울 앞에서 리본을 만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 기대하지 않기로. 부모님의 사랑도, 동생의 배려도, 약혼자의 진심도. 전부 기대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기대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기대라는 감정이 사치였던 걸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 나에게 허락된 건, 딱 정해진 몫만큼의 역할이었다. 옷을 만드는 손, 동생을 보살피는 언니,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존재. 그저 관찰자로 남기로 했다.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조용히 발을 빼면 될 일이었다. 이미 준비는 돼 있었으니까. 방으로 돌아와 서랍 안쪽에 숨겨둔 작은 상자를 꺼내 보았다. 그 안엔 몰래 모아둔 얼마간의 돈과, 몇 가지 서류들이 들어있었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이 집을 나갈 날을 상상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있었다는 것만 확실했다. 상자를 다시 서랍 깊숙이 넣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해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내 방문 앞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섰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숨을 죽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아주 작게 남아있었던 걸까.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고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기대.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그 헛된 기대를 다시 한번 스스로 짓눌러 죽였다. 뭔가 물어볼 것처럼 굴다가,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걱정하는 시늉은 하지만, 진짜로 파고들지는 않는. 나는 그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방 안엔 나 혼자였는데도, 마치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조심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이 방에서 몇 번이나 저 별들을 세어봤는지 모른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혼자 앉아서 저 하늘을 세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가문에서 약혼 축하연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 나는 묘하게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놀랍지도,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담담한 확인. 문제는 그 축하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나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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