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자님, 배신은 늦으셨어요

5화

뒤뜰의 밤공기는 서늘했다. 등불이 몇 개 켜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바람에 흔들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통에 분위기는 여전히 어둑했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저 멀리서 웅웅거렸고, 발밑의 자갈은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나는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거였는데, 태오가 굳이 따라 나올 이유가 없었다. '뭐야, 이 상황.' 이런 전개는 지분 배분표에도 없던 일이었다. 나는 조연, 아니 조연도 못 되는 배경 인물이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존댓말이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아 어색했지만, 이 집안에서는 원래 이렇게 격식을 차리는 게 익숙했다. 태오 앞에서는 특히 더. "그냥, 궁금해서요." "뭐가요." 태오가 잠시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등불 빛에 그의 옆얼굴이 얼핏 드러났다가 다시 그늘 속으로 숨었다. "서아 양은... 이 상황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대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무슨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스킬, '일단 못 알아들은 척하기'. "제가 리아 양과 가까운 것. 사람들이 다 알 정도인데, 서아 양만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아서요." 직설적인 말에 순간 말이 막혔다. "그, 렇게 보이셨습니까." 어미가 끊어졌다. 당황한 게 그대로 드러났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던 것도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태오는 그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눈치였다. 마치 실험 결과를 관찰하는 연구자 같은 표정으로. "화가 나시지 않습니까. 약혼자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 화. 그런 감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뎌진 지 오래였다. 애초에 이 약혼이라는 게, 나한테 무슨 감정을 가질 만한 관계였나 싶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화보다는 생존 본능이 더 컸다. 화는 사치였다. 아니, 정확히는 화낼 자격조차 없다고 느껴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화를 낸다고 뭐가 바뀝니까."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태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예상한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입꼬리가 애매하게 굳었다. "보통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텐데요." "저는 보통이 아닌가 보죠."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오래 서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태오가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잠깐만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놀란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였다. 이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인 게 언제였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약혼식 날에도 이 정도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손목을 잡힌 부분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밤공기는 서늘한데, 거기만 이상하게 온도가 달랐다. "손목 놓아주세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속으로는 이미 머리가 복잡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대체.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참고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오라버니, 여기 계셨네요?" 리아였다. 리아가 뒤뜰 입구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졌다가, 우리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오히려 느려지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치 상황을 관찰하며 계산하는 듯한 속도였다. 태오는 재빨리 내 손목을 놓았다. 그 손이 마치 뜨거운 냄비를 만졌다가 놓는 것처럼 빨랐다. "아,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왔어." 너무 자연스러운 거짓말이었다. 저 정도면 연기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아가 나와 태오를 번갈아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정말 미소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언니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별거 아니야." 태오가 대답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나서서 해명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해명할 게 있어야 해명을 하지. 리아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그 안에 무언가 판단이 서린 듯한 눈빛이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혹은 이미 확신한 듯한. 마치 시험 채점표를 손에 든 감독관처럼. "언니, 여기 좀 쌀쌀하지 않아요?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동생이 아니라 감독관 같은 말투였다. 친절한 말투 속에 숨은 압박감. 딱 봐도 '빨리 사라져 주세요'라는 뜻이었다. 굳이 해석기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반박할 힘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뒤에서 태오와 리아가 나란히 서서 무언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궁금해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자갈길을 걸으며 방금 태오가 던진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는 거냐고. 웃긴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정작 자기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남의 속을 캐물을 때가 아니라, 본인 속부터 좀 들여다보시는 게 어떨지.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태오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는 걸. 평소라면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시선으로 대했던 사람이, 오늘은 뭔가 다른 눈으로 나를 봤다. 관찰하는 듯한, 아니면 재는 듯한 그런 눈빛. 무심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봤지만 딱히 그럴듯한 게 없었다. 리아와의 관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순간적인 호기심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나쁜 예감이 들었다. 연회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등불 아래로 흔들리는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앞으로 나를 어디까지 흔들어놓을지, 나는 그때까지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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