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자님, 배신은 늦으셨어요

4화

약혼 축하연이라니. 웃긴 이름이었다. 정작 약혼한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축하는 무슨 축하란 말인가. 차라리 '눈치 게임 개막전' 같은 이름이 더 솔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주 백작가의 체면이 걸린 행사였기에 나는 순순히 준비에 응했다. 이럴 때는 그냥 협조하는 게 편했다. 반항해봤자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잔소리뿐이었으니까. 몸에 딱 맞는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하녀가 코르셋 끈을 조일 때마다 나는 숨을 참으며 벽을 붙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요." "이러다 갈비뼈 나가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하녀는 못 들은 척했다. 다들 이 집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못 들은 척하는 스킬을 배우는 모양이었다. 머리는 최대한 단정하게 올렸다.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그게 다였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이미 어딘가에 버려두고 온 지 오래였다. "언니, 오늘 좀 예쁜데요?" 리아가 준비하는 방 앞을 지나며 한마디 던졌다.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였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리아는 확실히 예뻤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연분홍빛 뺨, 누가 봐도 사랑받는 막내딸의 얼굴이었다. "고마워." 나는 짧게 답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이런 말에 굳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예전에는 저 말투 하나에도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은 그냥 배경음처럼 흘려보낼 수 있었다. 발전인지 무감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회장은 화려했다. 금박을 두른 촛대와 붉은 커튼, 그 사이를 오가는 귀족들의 웃음소리. 돈 지랄 보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치스러운 자리였다.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지고, 악사들은 구석에서 현악기를 켜고 있었다. 아버지의 경제 사정을 생각하면 이 연회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겉치레는 절대 놓지 않는 게 이 집안의 방식이었다. 체면이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이 집안은 진심으로 그렇다고 답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서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다. 손에 든 샴페인 잔은 사실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그냥 들고만 있었다. 뭔가를 들고 있어야 사람들 시선이 조금이라도 덜 어색해지니까. 그런데도 시선이 자꾸 나를 향했다. "저 아가씨가 그 장녀라며?" "약혼자가 여동생분과 더 가깝다는 소문이 있던데." "세상에, 저런 자리에 저렇게 태연하게 서 있는 것도 대단하네요." 귓속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소문은 이미 사교계에 퍼진 모양이었다. 나만 뒤늦게 알아챈 셈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당사자인 나보다 남들이 먼저 알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건 뭐, 회사 인사이동 소식을 본인만 모르고 옆 팀이 먼저 아는 격이었다. 씁쓸한 비유였지만 딱 맞는 비유였다. 연회 중앙에서는 태오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옷차림,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짓는 모습이 어디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 옆에 리아가 살포시 서서 웃고 있었다. 둘의 거리는 딱 붙어 있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히 자연스러워서 더 눈에 밟히는 거리였다. 약혼자인 나는 저 멀리, 그림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벽에 걸린 장식용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 그림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한서아 양."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버지의 사업 상대였던 노신사였다. 백발에 인자한 인상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계산이 빠른 상인의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약혼 축하드립니다. 좋은 인연이지요." 좋은 인연이라니, 웬 헛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그저 예의상 웃었다. 이 바닥에서는 진심을 말하는 사람보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걸 이미 배운 뒤였다. "감사합니다." "단주 백작님께서도 좋은 사돈을 두셨으니 이제 걱정을 덜으시겠습니다." 노신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지만, 나는 반쯤 흘려들었다. 이런 자리에서의 대화는 대부분 알맹이 없는 인사치레였고, 굳이 다 새겨들을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웃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 저 너머에서 태오가 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반가움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닌,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보다도 더 이상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곧 시선을 거두고 다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잔상이 오래 남았다. 무시당한 건가, 아니면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니 태오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몇 번 없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사이였고, 서로 필요에 따라 인사만 주고받는 정도였다. 처음 상견례에서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고, 그 뒤로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남들 눈에는 약혼자라 불리는 사이였지만, 사실상 서로에게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무심함이 신경 쓰였다. 왜?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바로 사라졌다. 답을 찾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저 사람과 나 사이에 감정 같은 게 낄 자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그 눈빛이 마음에 걸리는 건, 아마 오늘 밤 소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배경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나는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답답한 실내보다는 밖의 공기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악기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머리를 아프게 했다. 잠깐이라도 조용한 곳에서 숨을 돌리고 싶었다. 뒤뜰로 향하는 회랑을 걷는 동안,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촛불 냄새와 향수 냄새로 가득했던 실내와 달리, 바깥은 서늘하고 맑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일정한 박자로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누군가 나를 쫓아온 게 분명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돌아보니 태오였다. 연회장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이었다. 조명이 어둑한 회랑에서 그의 표정은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무언가 결심한 사람의 얼굴, 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나는 순간 멈춰 섰다. 피하고 싶었는데,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리아와의 소문에 대한 해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그냥 형식적인 인사라도 나누려는 걸까. 어느 쪽이든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와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적어도 겉으로는 흔들리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태오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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