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혼하시죠, 국토 절반 걸고

3화

"정말로 그 조약서 하나만 믿고 이 판을 벌이신 겁니까." 다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강서윤의 처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밤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촛불이 잠시 흔들렸고, 그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다인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 눈빛만큼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강서윤의 곁을 지켜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조약서는 그저 시작일 뿐이야." 강서윤은 예복을 벗어 걸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세필로 그린 듯 단정한 이목구비였지만, 그 안에는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의 그림자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거울 속 여인은 분명 이번 삶의 얼굴이었으나, 그 눈동자에는 이미 한 번 늙어버린 사람의 지친 빛이 배어 있었다. "이 한 달 동안, 지난 삶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씩 꺼내 써야 해." "하나씩, 이라 하심은……." 다인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조급하게 굴면 의심을 산다는 뜻이지." 강서윤은 머리 장식을 하나씩 풀어내며 대답했다. "지난 삶에서 나는 너무 급하게 굴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지난 삶에서 배운 것은 단지 남편의 배신뿐이 아니었다. 조정 안에서 누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어느 대신이 뒷돈을 받고 있었는지, 몇 해 뒤 어느 지방에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흔들릴지, 심지어 어느 궁녀가 어느 대신의 첩자로 들어와 있는지까지—그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낡은 지도처럼 새겨져 있었다. 지도는 이미 한 번 걸어본 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 길 위에서 조금씩 방향을 틀어볼 참이었다. "다인, 겁먹은 얼굴 하지 마." 강서윤이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다시 버림받을 생각이 없어. 그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야." 다인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촛불이 다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다음 날부터 강서윤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움직였다. 아침 일찍 호부 상서를 처소로 불러들여, 차를 한 잔 권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서부 지방의 토질과 지난 오십 년간의 강우 기록을 물었다. 상서가 의아한 얼굴로 자료를 뒤적이는 사이, 그녀는 삼 년 뒤 그 지방에 큰 가뭄이 들 것을 마치 예감처럼 흘리며 미리 곡창을 대비하게 만들었다. "그저 근래 서부에서 올라온 상소들의 문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요." 그녀는 이렇게 둘러댔고, 상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후에는 병조의 젊은 관리와 마주 앉아, 국경을 넘나드는 밀수 조직의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요 며칠 시전에서 낯선 은괴가 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녀는 찻잔을 매만지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고, 그 은괴의 출처를 따라가면 결국 한유리의 외숙에게 닿을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흘려 흔들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예언처럼 정확했으나, 그 근거는 언제나 그럴듯한 소문이나 우연한 관찰로 위장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우연히 들은 이야기라 여겼고, 그 우연이 쌓여 결국 확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알아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이도현은 그런 강서윤을 지켜보며 점점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그녀의 주변에서 오가는 말들이 하나같이 그녀의 예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서고에서 서책을 정리하던 그녀를 불쑥 찾아갔다. "당신, 요즘 좀 이상해졌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을 때, 강서윤은 서책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담담히 대꾸했다. "이상하다니요, 무엇이 말입니까." "예전 같았으면 그런 조약서 따위는 몰랐을 것이고, 이렇게……." 그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이렇게 냉정하지도 않았지. 마치, 마치 모든 것을 이미 겪어본 사람처럼 굴고 있어." 그 말에 강서윤의 손끝이 잠시 멈췄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서책 한 권을 마지막으로 서가에 꽂아 넣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안개 낀 숲처럼 짙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사람은 변합니다, 폐하. 특히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요." 이도현은 그 말에 무언가 짚이는 듯 미간을 좁혔으나, 정작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버림받는다니, 그게 무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다시 서책 더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끝맺었다. "그저 지나간 생각일 뿐이니,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그 한마디에 이도현은 말문이 막힌 듯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떠났고, 강서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서고를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렸고, 문턱을 넘기 전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려는 듯한 기색까지 보였으니까. 그러나 흔들림은 아직, 회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강서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흔들림이 회한이 되기까지, 이 남자에게는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강서윤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곧... 그 사람이 움직일 거야." 그러나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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