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치적 포석을 쌓아가는 시간은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 다인은 매일 밤 강서윤의 처소에 은밀히 들어, 그날 모은 정보와 대신들의 반응을 정리한 서찰을 함께 검토했다. 궁녀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는 일도, 촛불 하나만 켜둔 채 목소리를 낮춰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이제는 손에 익어, 처음의 조심스러움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촛불이 다 닳아갈 무렵까지 두 사람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대곤 했는데, 그 시간 동안만큼은 강서윤도 왕비라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깨에 걸친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틀어 올린 머리 몇 가닥이 흘러내려도 신경 쓰지 않는 그 모습이, 다인의 눈에는 낮의 강서윤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비쳤다.
"이쪽 지역은 한유리의 외가와 연이 닿아 있는 곳입니다." 다인이 지도의 한 점을 손끝으로 짚으며 설명하려는 순간, 강서윤도 같은 지점을 짚으려 손을 뻗었고, 두 사람의 손끝이 지도 위에서 살짝 닿았다.
순간 강서윤은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오르는 것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손을 슬쩍 거두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것이 놀라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미안."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다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귓가가 살짝 붉어진 것을 촛불 아래에서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젊은 남자의 얼굴에 스친 붉은 기색은 촛불 아래에서도 선명했다.
그는 서둘러 지도 위의 다른 지점으로 손을 옮기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여기 표시된 곳은 지난달 상소를 올린 대신의 처가와도 겹칩니다. 우연이라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만."
강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 둘을 하나로 엮어볼 수도 있겠군."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흘러나왔는데, 다인은 그것을 눈치챘으면서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서찰과 지도 사이로 머리를 파묻었지만, 방금 닿았던 손끝의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지난 삶에서 강서윤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궁에서도, 궁 밖에서도 늘 혼자였고, 웃음을 나눌 사람도,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없이 홀로 버텨왔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배신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믿었던 손이 등을 찌르고, 다정했던 말이 독이 되어 돌아오던 그 지난 생의 기억들은, 지금도 문득문득 명치 아래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이상하게도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인이 서찰을 읽어주는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슬며시 풀리는 순간이 있었고, 그가 실수로 먹물을 손가락에 묻히고는 아이처럼 당황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리기도 했다. 이것이 신뢰라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그녀는 아직 그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로, 그저 다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데워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 온기가 낯설어서, 강서윤은 종종 밤이 깊어 다인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지도를 바라보곤 했다. 지도 위에 아직 그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그 지점으로 되돌아갔다.
* * *
한편 이도현은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다른 종류의 불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서고로 향하던 길에 그는 강서윤의 처소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웃음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추었고,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의 무게마저 잊은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궁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대전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필요한 말만 골라 하는 사람이었고, 웃음이라 부를 만한 표정은 그저 예의상의 미소가 전부였다. 그런데 문 너머로 들려오는 저 웃음소리는, 그가 알던 강서윤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부드러웠다.
그는 발걸음을 멈춘 채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릴 용기도, 그대로 돌아설 결심도 서지 않은 채로, 그저 어둠 속에서 그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촛불 빛이 복도 바닥에 가느다란 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는 그 빛의 경계를 몇 번이고 눈으로 좇으며 서 있었다.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궁금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 한복판을 짓눌렀는데, 그것을 그는 아직 질투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왕비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일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며 걸음을 돌렸다.
그날 밤, 그는 서고에서 책 한 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촛불만 태우고 앉아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대전에서 마주친 강서윤에게 그가 불쑥 물었다. "요즘 밤늦게까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오."
주변에 서 있던 내관들이 흠칫 놀라 서로 눈치를 살피는 사이, 강서윤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까지 폐하께 고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과인이 묻고 있소." 이도현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이 왕으로서의 위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그 자신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였다.
"국정에 관한 일입니다." 강서윤은 짧게 답하고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짧은 대답에 이도현의 얼굴이 굳어졌고, 강서윤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처음으로 낯선 종류의 불안이 스며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캐묻고 싶었지만, 왕비의 뒷모습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대전의 문턱을 넘고 있었고, 그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그 문턱만 바라볼 뿐이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이도현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어젯밤 문 너머로 들었던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계속 귓가에 남아 그를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