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혼하시죠, 국토 절반 걸고

5화

건국제로부터 보름이 흐른 어느 오후, 후원에는 늦봄의 볕이 나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자 주위로 흐드러진 작약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옅은 분홍빛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 다과상 위로 내려앉았고, 갓 우려낸 국화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후궁들과 대신 부인 몇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화로운 오후였다. 강서윤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이런 자리도 나름 익숙해졌구나.'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이런 다과회 자리 하나가 전쟁터 같았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웃는 얼굴로 앉아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안심이었는지, 그녀는 곧 깨닫게 될 참이었다. 한유리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도자기와 상판이 부딪히는 그 짧은 소리에, 몇몇 부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한유리는 비단결처럼 흐르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왕비님, 소첩이 최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주변에 앉아 있던 후궁들과 몇몇 대신 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모였다.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곤거리는 이도 있었고, 아예 숨을 죽이고 이쪽을 살피는 이도 있었다. 강서윤은 찻잔을 든 채로 담담히 시선을 마주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경계가 곤두서 있었다. 저 여자가 이렇게 운을 띄울 때는 언제나 뒤에 가시가 숨어 있었으니까. "어떤 이야기 말씀이신지요." "지난 삶에서—아니, 실례했습니다. 소첩이 잘못 말했나 보군요." 한유리가 입가를 살짝 가리며 웃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강서윤을 관찰하고 있었다. 안개 낀 숲처럼 깊고 서늘한 눈동자가, 상대의 표정 한 조각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얽혀들었다. "소첩이 들은 이야기는, 왕비님께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자라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강씨 가문의 귀한 여식이라 하기에는 이상한 이야기지요." 대전 안이 아니라 후원의 다과회였는데도, 그 정적은 대전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새소리조차 잦아든 듯한 침묵 속에서, 강서윤의 손끝이 찻잔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이었지만, 본인은 그 진동을 손끝 마디마디로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삶에서 그녀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이혼당한 뒤, 궁을 쫓겨난 뒤에 벌어진 일이었고, 아무도—이 세계 누구도 알 수 없는 시간선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저 여자가, 이 세계의 한유리가 그 일을 알고 있단 말인가. 강서윤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이 삶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빈민가 근처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은 오롯이 지난 삶,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의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었다. "소첩이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강서윤은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배 속에 힘을 주고, 표정을 그림처럼 굳혀야 했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람을 시험하려 드는 것은, 정성녀답지 못한 처사인 듯합니다." "근거가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한유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이미 승부의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소첩의 시비 하나가, 왕비님과 아주 닮은 여인을 예전 빈민가에서 본 적이 있다더군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노파와 함께였다고 하던데요." 강서윤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가시는 것을, 그녀 자신도 감출 수 없었다. 노파의 흉터, 그 골목의 냄새, 그리고 마지막 밤의 어둠까지—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곰팡내 나는 좁은 방, 깨진 사기그릇에 담긴 식은 죽, 그리고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던 그 노파가 자신을 거두어 주며 했던 말까지—전부 이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기억들이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시간선을 넘어 그녀의 과거를 엿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존재한 적 없는 그 기억을, 저 여자가 알 리 없었다. "그, 그것이 무슨……."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도자기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힘을 주었는데도, 정작 손안의 찻잔이 갈라지는 소리를 알아차린 것은 한참 뒤였다. 주변에 앉은 부인들도 그 파열음에 놀라 일제히 시선을 던졌지만, 정작 그 시선의 무게조차 지금 그녀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유리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한 듯 눈을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잘 차려진 함정에 마침내 걸려든 사냥감을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소첩이 이 이야기를, 폐하께도 이미 전해드렸답니다." 다과회장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작약꽃이 다시 한 번 바람에 흔들려 꽃잎이 떨어졌지만, 그 부드러운 낙하조차도 지금 이 자리의 서늘함을 덮지는 못했다. 누군가의 찻잔에서 옅은 김이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이, 강서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강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균열이 번지는 찻잔을 손에 쥔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안의 도자기는 이미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져가고 있었고, 그 균열은 마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번지는 불안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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