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건... 몸이 약해 자주 마시는 약초 물입니다." 서윤은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미령은 유리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병 속의 액체는 옅은 회색을 띠고 있었는데, 흔들릴 때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안쪽에서 미세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세상에 이런 색을 내는 약초가 존재할 리 없었다.
"약초 물이 이런 색을 낸다고? 냄새도 이상하고." 그녀는 병을 코앞까지 가져가 킁킁거렸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썩은 흙 냄새와 쇠 냄새가 섞인 듯한,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게다가 서윤 양, 요즘 안색이 부쩍 나빠진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는 거 아니니?"
"별일 아닙니다." 서윤은 다가가 병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손끝이 병에 닿는 순간에도 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몸에 좋은 것이니 걱정 마세요."
"몸에 좋은 게 이런 냄새를 낸다고?" 한미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윤을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거짓말의 흔적을 몸에서 찾아내려는 것 같았다.
서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는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질 것이었다. 그것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미령은 잠시 서윤을 노려보다가 결국 병을 넘겨주었다. "수상한 물건이니 앞으로는 눈에 띄지 않게 관리해라. 강백작가에 이상한 걸 들여왔다는 소리가 나오면 곤란한 건 너뿐이 아니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병 쪽을 흘겨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서윤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들킬 뻔했어.' 심장이 아직도 세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고, 병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만약 병 속의 액체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려졌다면, 어둠의 마법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서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의 마법을 다룬다는 소문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그녀는 어머니를 통해 이미 배웠다.
서윤은 병을 옷장 깊숙이 숨겨진 작은 함 속에 넣고 자물쇠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
다음 날 학원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위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3왕녀 이채희와 윤재하가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서윤을 발견하고 부르는 시늉을 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슬쩍 그쪽으로 몰렸다가, 이내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시작되리라 예감한 듯 걸음을 늦췄다.
"이서윤 영애." 채희가 부채를 살짝 펼치며 말했다. 부채 뒤로 반쯤 감춘 웃음이 더 얄미웠다. "강 공자님이 요즘 소은 양과 자주 붙어 다니시더군요. 혼약자로서 걱정되지 않으세요?"
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머,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것처럼 들리네요." 채희가 킥킥거리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윤재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신경 안 쓰인다니, 대단하시네요." 그는 팔짱을 끼고 서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보통이라면 저런 얼굴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은 양을 이길 수 없을 텐데, 애초에 경쟁이란 게 성립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신 건가요?"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킥킥거렸다.
서윤의 걸음이 짧게 흔들렸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이 살짝 말려들었을 뿐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지나쳐 걸었다.
등 뒤에서 채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래도 강 공자님이 안 돌아본다니,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게요. 저러다 결국 파혼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윤재하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걱정이라는 말과 웃음소리가 함께 섞이니 그것이 진짜 걱정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서윤은 그 말들을 곱씹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익숙해져야 했다. 익숙해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뇌면서도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
그날 밤, 발작이 다시 찾아왔다.
서윤은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방 안의 사물들이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흔들렸다. 촛불이 이상하게 늘어져 보였고, 벽에 걸린 그림의 윤곽이 뭉개졌다. 귓속에서는 낮은 울음소리 같은 이명이 울렸고, 그 소리 사이로 짧은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 문양이 온몸을 뒤덮은 자신의 모습. 손끝부터 서서히 투명하게 흐려지는 육체.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텅 빈 방.
그 텅 빈 방 안에서 서윤은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서윤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손이 떨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이불을 움켜쥔 손가락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셨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계모나 소은이 알게 되면 강백작가에서 쫓겨날 거고, 도현에게 알려지면... 도현이 무슨 짐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도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왔다.
결론은 하나였다. 홀로 감당하는 것.
***
서윤은 자정이 넘은 시각,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복도의 촛불은 이미 대부분 꺼져 있었고,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워야 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 자주 드나들던 낡은 별채가 있었다. 다들 잊고 방치된 건물이었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반쯤 덮고 있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서윤은 별채 안쪽 벽에 손을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알려준 짧은 구절이었다. 몇 마디의 낮은 음절이었는데, 발음할 때마다 손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순간 벽의 일부가 스르르 물결처럼 갈라지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있었구나.' 서윤은 숨을 삼켰다. 몇 년 전 어머니를 따라 딱 한 번 와본 곳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몸이 저절로 이끌리듯 찾아낸 것이다. 마치 이 몸 어딘가에 그 기억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처럼.
통로 안쪽은 작은 방이었다. 습기 찬 공기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면 가득 낡은 서적들이 꽂혀 있었고, 방 중앙에는 검은 원이 그려진 낡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의식용 공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문양은 손전등도 없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서윤은 책장 앞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먼지 앉은 책등을 훑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마다 어머니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왔다. 어머니의 필체로 적힌 낡은 노트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가의 기록.'
서윤은 그 제목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알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