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서윤은 미리 써 둔 편지를 품에 넣고 전서구 담당 하인을 찾아갔다. 봉투 겉면에는 서준의 이름만 적어 두었을 뿐, 안에는 별다른 내용 없이 안부를 묻는 짧은 문장 몇 줄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서윤은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꺼내 봉투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혹시라도 검열에 걸릴 만한 말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오늘 오전 서신은 부인께서 먼저 검수하신다고 하셔서요."
"검수라니?"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가문 안팎으로 나가는 서신은 안전을 위해 부인께서 살펴보신다고 합니다. 최근 정해진 규칙이라..." 하인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도 이 규칙이 딱히 반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서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알아챘다. 한미령이 자신의 서신을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유리병 사건 이후로 그녀에 대한 경계가 한층 강해진 게 분명했다. '고작 서신 하나까지.' 서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인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서윤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지만, 편지를 품에 넣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몰래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저택 안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녀들도, 하인들도 결국은 한미령의 눈과 귀였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서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딘가로 보고되고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서준이 다스리는 영지는 왕도에서 말을 타고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설령 편지가 무사히 닿는다 해도, 답장을 받기까지는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왕복 스무날. 서윤은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세어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셀 필요도 없이 아득한 시간이었다.
'설이안이 며칠 안에 온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
서윤은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벽에 부딪혔음을 느꼈다. 형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었다. 저택은 넓었지만 그녀가 딛고 설 곳은 좁아지고 있었다.
***
그날 오후,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서윤은 도서관 앞을 지나다 하녀들 몇이 모여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회랑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였는데, 목소리가 낮으면서도 은근히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거 들었어? 후작가 영애 말이야, 그 마법 말이야." 한 하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둠의 마법 쓰는 거? 나도 들었어. 손대면 큰일 난다던데." 다른 하녀가 몸을 움츠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세 번째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인 듯했다.
"저번에 청소하던 애가 그 방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그 뒤로 며칠 동안 몸이 안 좋았대. 그래서 다들 그 아가씨 물건은 손대지 말라고 하잖아."
"진짜? 무서워라." 신참 하녀가 팔을 감싸안았다.
"게다가 밤에 별채 쪽에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온다는 얘기도 있어. 촛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서윤은 걸음을 멈추고 그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내 마법이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났구나.'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 소문이 오히려 자신이 지고 있는 대가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겉으로는 우스갯소리처럼 도는 이야기였지만, 그 안엔 실체가 있었다. 청소하던 아이가 정말 아팠는지, 아니면 그저 겁을 먹고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든 서윤에게는 유쾌할 리 없는 소식이었다.
하녀들은 서윤을 발견하고 순간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아, 아가씨." 한 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둘도 서로 눈치를 보며 허리를 굽혔는데, 그 동작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어색하게 동시였다.
서윤은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굳이 해명할 필요도, 화를 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등 뒤에서 하녀들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안도의 숨을, 누군가는 여전히 겁먹은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며칠 후, 서윤은 저택 정원에서 우연히 어린 시녀 하나와 마주쳤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였다. 손에는 물통을 든 채로, 화단에 물을 주다 서윤과 눈이 마주친 모양이었다.
서윤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려 다가가자, 시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물통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 저는 이만..." 시녀는 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심지어 물통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갈 정도였다.
서윤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물통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시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로 보이는 걸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소문은 이미 저택 곳곳으로 퍼져 있었다. 후작가 영애의 마법은 손대면 안 된다는, 반쯤 장난스럽지만 어딘가 진심이 섞인 이야기. 처음엔 그저 우스운 헛소문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윤은 정원 한가운데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린 회색빛 하늘이었다. 바람 한 자락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서윤은 그마저도 알아채지 못한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다들 나를 두려워하는구나.'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도현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 그녀를 점점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려 시작한 힘이,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하나둘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
그리고 그 밤, 서윤은 다시 어둠의 마법을 다스리기 위해 홀로 별채로 향했다. 촛불 하나만 든 채 복도를 걷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통제를 정교화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했다.
의식용 방 안, 서윤은 마법진 위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방 안은 낮보다도 어두웠고, 오직 촛불 하나만이 마법진의 문양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문양을 그렸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감각이었다. 손끝이 저릿하고,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낮아지는 느낌.
그 순간, 자신의 손끝이 촛불 너머로 흐릿하게, 마치 유리처럼 비치는 것을 서윤은 보았다.
'뭐야, 이게.'
처음엔 눈의 착각이라 여겼다. 촛불이 흔들리며 만들어낸 그림자 놀음일 뿐이라고. 그러나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아도 손끝은 여전히 투명했다. 손가락 마디의 뼈 형태까지 어렴풋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놀라 손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팔꿈치까지 투명해진 살갗은 그대로 촛불의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서윤은 숨을 멈춘 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촛불의 노란빛이 살갗을 지나 반대편 벽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서윤은 황급히 마법진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팔은 여전히 검은 기운과 이어진 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