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노트를 펼치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먼지와 습기, 그리고 은은한 약초 향이 뒤섞인 냄새였다. 서윤은 코끝을 찡그리며 촛불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왔다. 촛불의 그림자가 노트 위에서 흔들거렸다.
첫 페이지는 한서영의 필체로 시작되었다. 단정하고 힘 있는 글씨였다. 서윤은 그 글씨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 보았다. 잉크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어 있었지만, 어머니의 손이 이 종이 위를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손끝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둠의 마법은 대가를 요구한다. 저주를 소거할수록 그 대가는 시술자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이 소모는 해마다 배가된다. 되돌릴 방법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서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몇 번이고 되뇌었던 문장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눈으로 다시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해마다 배가된다.' 서윤은 그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속으로 셈해보았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시선이 멈췄다.
『다만 소모를 늦추는 방법은 있다. 힘의 통제를 극한까지 정교화하면 대가의 진행 속도를 조금씩 늦출 수 있다. 이는 훈련으로만 가능하며, 스승이나 동일한 계통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통제를 정교화한다.' 서윤은 그 구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손에 쥔 것이라곤 절망뿐이었는데, 이건 적어도 절망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손에 잡히는 희망이었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노트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종이 가장자리에 살짝 파고들 정도였다.
***
노트를 더 넘기던 서윤의 손끝이 문득 멈췄다.
후반부에는 다른 필체가 섞여 있었다. 더 오래되고, 다소 흐트러진 글씨였다. 마치 급하게 쓰다가 손이 떨린 것처럼 획이 삐뚤거렸다. 서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어머니 글씨가 아닌데.' 필체가 다르다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 부분을 적어 넣은 걸까.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필체를 옮겨 적은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직접 이 노트에 손을 댄 걸까.
의문은 이어졌지만 답은 없었다. 서윤은 일단 내용부터 읽기로 했다.
『같은 계통의 힘을 지닌 이가 하나 더 있다. 다만 그 힘의 성질은 반대에 가깝다—파괴가 아니라 생성, 소모가 아니라 축적. 흙과 물을 다스리는 자.』
서윤은 숨을 죽였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이는 어머니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마저도 이미 세상에 없으니, 자신이 유일하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흙과 물을 다스리는 자라니. 파괴가 아니라 생성이라니. 서윤은 그 개념이 낯설어서 몇 번이나 문장을 곱씹었다.
『이웃 나라의 한 가문, 삼남으로 태어난 아이. 이름은 설이안.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으나, 그 인연이 언젠가 너에게 닿을 날이 올 것이다.』
서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설이안...' 낯선 이름이었다. 발음해본 적도 없는 이름을 입안에서 조용히 굴려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듯, 낯선 듯한 기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밑에 적힌 짧은 한 줄이 심장을 더 세게 흔들었다.
『그가 며칠 안에 이 땅을 찾을 것이다. 그를 만나거든, 이 노트를 보여주어라.』
서윤은 그 문장을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며칠 안에, 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서윤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촛불이 조금씩 타들어가며 심지가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며칠 안에 찾아온다니. 이 기록은 언제 적힌 거지?' 서윤은 노트 마지막 장을 넘겨봤지만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앞장도, 뒷장도 마찬가지였다. 종이 어디에도 시간을 가늠할 흔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만약 이 문장이 어머니가 생전에 쓴 것이라면, '며칠 안'이라는 말은 이미 몇 년 전에 지나가버린 예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다른 필체의 주인이 훨씬 나중에 이 부분을 덧붙였을 수도 있고.
'이 예언 같은 기록이 지금 시점에도 유효한 것인지 알 수 없어.' 서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답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술렁였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설이안이라는 사람이 정말 온다면.' 서윤은 노트를 품에 안았다. 종이의 서늘한 감촉이 옷 위로 전해졌다. '내가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온기가 가슴 안쪽에서 번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기대해서는 안 됐다. 이 세상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희망은, 지금까지 늘 실망으로 끝났으니까. 서윤은 그 사실을 몸으로 배워온 사람이었다.
***
서윤은 노트를 조심스레 챙겨 넣고 별채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통로가 다시 벽처럼 닫혔다. 돌벽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원래의 매끈한 형태로 되돌아가는 걸 서윤은 잠시 지켜보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밤하늘에 별이 유난히 흐릿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서윤은 노트를 옷 안쪽에 더 깊이 밀어 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서준 오라버니에게 알려야 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5년 연상인 친형 이서준은 이후작가의 당주로서 먼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벌써 오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편지도 뜸했다. 영지 간 거리가 워낙 멀었고, 서준은 늘 바빴다.
서윤은 걸으며 오라버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목소리는 그대로일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 노트를 보여드리면, 오라버니는 뭐라고 하실까.' 놀라실까, 아니면 이미 알고 계셨을까. 서윤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굴렸다.
***
서윤은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고 편지지를 펼쳤다. 오랜만에 형에게 쓰는 편지였다. 무엇부터 써야 할지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몇 번이나 머물다 다시 떨어졌다. 안부부터 물어야 할지, 아니면 곧바로 노트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너무 길게 쓰면 오라버니가 부담스러워할까 싶기도 했고, 너무 짧게 쓰면 성의가 없어 보일까 싶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짧게 몇 줄만 적었다.
『오라버니, 잘 지내시는지요. 여쭐 것이 있어 편지를 씁니다. 설이안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써놓고 보니 지나치게 간결했다. 그러나 더 길게 쓴다고 해서 설명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노트에 대해 구구절절 적기에는 종이 위의 글씨보다 사람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편지가 무사히 형에게 닿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서윤은 편지를 조심스레 접어 봉투에 넣었다. 초를 녹여 봉인을 하고, 하인을 시켜 다음 날 아침 일찍 보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노트는 침대 옆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자물쇠가 없는 서랍이었지만, 지금 이 저택 안에서 이 노트를 노릴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서윤은 다음 날 곧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