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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택의 서재는 늘 조용했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시간, 나는 몰래 서재에 들어가 문서들을 뒤졌다. 미래의 기억이 각성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어른의 계산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발끝을 세우고 문을 열 때마다 나무 경첩이 낮게 삐걱거렸다. 그 소리조차 심장을 조이게 만들었다. 혹시 누군가 깨지 않았을까, 나는 매번 숨을 죽이고 복도를 살폈다. 다행히 이 시간의 저택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혼약 문서가 어디 있을까.' 나는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며 종이 뭉치를 뒤졌다. 서랍마다 손을 넣을 때 느껴지는 감촉이 달랐다. 어떤 서랍은 매끈한 결재 서류들로 가득했고, 어떤 서랍은 곰팡내 나는 오래된 편지 뭉치로 채워져 있었다. 먼지가 쌓인 낡은 서랍에서 인장이 찍힌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유난히 뻣뻣했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 눌린 밀랍 인장의 매끈한 표면. 왕실과 선우 가문 사이의 혼약 계약서였다. 계약서의 문구는 명확했다. 선우서하는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왕태자 이하준과 정식으로 혼인한다. 혼약 파기 시 선우 가문은 왕실에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나는 그 조항을 몇 번이고 눈으로 되짚었다. 숫자로 명시된 위약금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가문의 곳간을 통째로 털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이 계약이 목줄이었구나.' 미래에서 나는 이 계약에 갇혀 있었다. 왕태자의 혼약자라는 신분이 처음에는 명예였지만, 결국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밧줄이 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밧줄이 목을 조르던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숨이 막히고, 손끝이 저리고, 눈앞이 하얘지던 그 마지막 순간. 계약을 깨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하지만 위약금을 감당할 방법이 없다면, 그저 목을 조르는 밧줄을 더 세게 당기는 꼴이 될 뿐이었다. '서두르면 죽는다.' 나는 문서를 원래 자리에 조심스레 되돌려 놓았다. 다음으로 나는 왕실 내부 사정을 알아야 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왕태자를 조종한 이는 서지유라는 소녀였다. 표면적으로는 몰락한 남작가의 딸이자 왕태자의 가엾은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매혹의 마법을 다루는 자였다. 그 여자의 웃음이 얼마나 무해하게 보였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젖은 눈동자, 상처받은 듯한 표정. 모든 것이 계산된 무기였다는 걸 미래의 나는 죽기 직전에야 깨달았다. '그 여자가 진짜 악역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금 누구에게 말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증거도 없이, 근거도 없이 미래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자체로 배척당할 처지였다. 최악의 경우, 저주에 걸렸다며 가문에서조차 내쳐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서재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며 바닥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그렸다. 조급하게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미래를 앞당길 뿐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유모나 시녀들과의 대화 속에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사탕을 얻어먹는 어린아이처럼 굴어야 했다. "유모, 왕실에서 요즘 어떤 이야기가 도는지 알아?" "아가씨가 그런 걸 왜 궁금해하세요?"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순진한 놀란 표정에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왕실 정치를 캐묻는다는 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앞으로 왕태자비가 될 사람인데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 유모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는 참 별나세요."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지만. 유모는 못 이기는 척 왕실의 이런저런 소문들을 들려주었다. 왕제의 보좌관이자 실권자인 황보진혁 공작이 최근 왕제파와 왕태자파 사이의 균형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 왕태자가 최근 어느 몰락 가문의 여식과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까지. 유모는 별생각 없이 흘리듯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퍼즐 조각이었다. '서지유겠지.' 나는 소문의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맞춰나갔다. 미래의 기억과 지금의 정보가 겹쳐지는 순간,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서지유는 아직 왕태자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전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이 판을 뒤엎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시녀들의 뒷담화, 손님들이 흘리고 가는 말, 아버지의 손님 접대 자리에서 들리는 대화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 곁을 얼쩡거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나를 귀여워하며 무릎에 앉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방심이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 '황보진혁.' 나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그는 왕태자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제파의 완전한 하수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저울로 세력을 조율하던 인물이었다. 미래의 나는 그를 몇 번밖에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어떤 온도였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오직 계산만 하는 눈빛. '그라면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그것이 내가 그를 첫 번째 목표로 삼은 이유였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따지는 자라면, 미래를 안다는 나의 능력조차 하나의 카드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반대로 왕태자처럼 정의감에 취한 인물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결국 감정에 휘둘려 무너질 것이 뻔했다. 정의감이라는 것도 결국 그럴듯한 사람 앞에서는 힘없이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일 뿐이었다. 나는 그 얼음이 서지유의 손짓 한 번에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 죽기 전까지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나는 서재의 문을 조용히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저녁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스스로에게 되풀이해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그 무도회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정확히 3년 뒤에 벌어질 일이었다. 3년. 그 안에 나는 계약을 깨고, 세력을 만들고, 살아남아야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미래를 아는 자에게는 오히려 지독하게 짧은 시간이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모든 계산이 무너지고 나는 또다시 그 밧줄에 목이 졸릴 운명이었다.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이름 하나를 적었다. 황보진혁. 그 이름 아래, 나는 앞으로 캐내야 할 정보들의 목록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그의 거처, 그가 자주 드나드는 장소, 그의 측근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펜을 쥔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종이 위에 잉크가 마르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 옆에 작은 물음표를 하나 그려 넣었다. 과연 그가 열두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아니, 정확히는, 이 계산속을 가진 괴물 같은 아이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그를 직접 만나야만 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열두 살 소녀가 어떻게 왕제의 최측근을 만난단 말인가. 나는 촛불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복도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서재 근처를 오갈 사람은 없었다. 나는 촛불을 서둘러 끄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점점 서재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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