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작님, 저랑 손잡을까요?

5화

한 달 후, 왕제파 소속 후작의 부정 축재 혐의가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사교계를 뒤흔들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찻잔을 든 손들이 멈추고, 부채 뒤에서 수많은 눈이 오갔을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내 예상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그 후작은 왕태자파를 흔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결국 자신이 먼저 무너졌던 인물이었다. '예정대로군.' 그날 오후, 나는 황보진혁의 저택에서 온 서신을 받았다. 서신을 건네는 하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온 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무게가 다르다는 걸,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거래를 시작합시다.' 먹의 농도가 일정했다.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쓴 글씨였다. '이 남자는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서신을 두 번 읽고, 다시 접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보내 다음 만남의 시간과 장소만을 전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정보를 주고받았다. 장소는 매번 달랐다. 때로는 외곽의 별장, 때로는 이름 없는 다과점의 구석 자리였다. 나는 미래의 기억 속에서 벌어질 사건들을 조금씩 흘렸다. 너무 많이 주지도, 너무 적게 주지도 않았다. 정확히 그가 필요한 만큼만. 그는 그 정보를 이용해 왕제파와 왕태자파의 균형을 조율했다. 한쪽이 지나치게 기울면 무너지는 건 나였다. 그래서 나는 이 균형이 유지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철저히 이해관계로 얽힌 관계였다. 그는 나를 '선우 영애'라 불렀고, 나는 그를 '공작님'이라 불렀다. 그 이상의 호칭은 서로 필요 없었다. '이게 밀약이다.' 계약서 한 장 없는, 그러나 계약서보다 더 단단한 약속. 어느 한쪽이 배신하면, 둘 다 파멸이라는 걸 아는 자들끼리의 침묵. 삼 년째 되던 해, 왕실에서 대규모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창가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이 무도회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뒤에 벌어질 파멸의 무도회와 이 무도회가 별개의 자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무도회는, 그저 사교계라는 전장의 첫 시험대에 불과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화려한 조명 아래 늘어선 귀족들의 시선을 느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흩어져 반짝였고, 악단의 현악기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 낮게 웃는 소리, 술잔이 부딫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왕태자 이하준은 저 앞쪽에서 몇몇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여전히 곧았고, 목소리에는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연한 갈색 머리, 유난히 큰 눈, 몰락 가문의 여식답게 단출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옷차림. 드레스의 재질은 값싼 편이었지만, 그걸 입은 몸짓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지유.' 나는 확신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던 그 얼굴을, 잊을 리 없었다. 그녀는 왕태자 곁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접듯이 웃는 그 표정은 누가 봐도 순진해 보였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은 계산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게 진짜 얼굴이다.' 저 웃음의 각도, 저 시선의 방향, 저 침묵의 타이밍까지도. 전부 계산된 것이라는 걸, 나는 미래의 기억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무도회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괜히 오래 쳐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좋을 게 없었다. 지금은 관찰할 때가 아니라, 관찰당하지 않을 때였다. 몇몇 귀족 부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선우 영애, 오늘 유난히 아름다우시네요." "과찬이십니다." 나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들의 눈빛 속에는 저마다 다른 의도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순수한 호기심, 누군가는 딸을 위한 정보 수집, 누군가는 그저 자리를 지키기 위한 형식적인 인사. 나는 그 셋을 구분해 각기 다른 온도로 대응했다. 그때, 한 젊은 백작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영애께서 최근 곡물 시장 쪽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는 순간 눈매를 좁혔다. '벌써 이렇게까지 소문이 퍼졌나.' 그 백작의 손끝에는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장부를 직접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이 질문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그저 상식적인 대화를 조금 나눴을 뿐입니다." 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목소리의 높낮이를 평소와 똑같이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 젊은 백작의 눈빛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는 내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귀족 영애가 시장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심해야 한다.' 너무 많은 정보력을 드러내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유능해 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경계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백작에게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최근 유행하는 자수 무늬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는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화제를 따라왔다. '이 정도면 됐다.' 무도회장 저편에서 황보진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큰 키에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검은 예복 위로 은실 장식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의 등장에 몇몇 귀족들이 자세를 고쳐 앉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선우 영애, 오랜만입니다." "공작님도 오셨군요." 우리는 겉으로는 그저 인사를 나누는 사이처럼 보였지만, 짧은 대화 속에는 이미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 귀족들에게 건넨 인사와 완전히 같은 억양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로 전하는 것이 다른, 익숙한 이중의 대화법이었다. "오늘 밤, 조심하십시오." 그가 낮게 말했다. "저기 왕태자 옆에 있는 소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도 눈치챘구나.' 나는 속으로 놀랐다. 황보진혁 정도의 인물이라면, 서지유의 이상함을 감지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찰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 남자와 손을 잡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작게 답했다. "다만 아직은 지켜봐야 할 때입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는 의문이 섞여 있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영애의 판단을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겉으로는 날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투 속에서 경계심을 읽어냈다. 그때, 왕태자 이하준이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서하 양, 이곳에 있었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예전과 다른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벌써 변하고 있다.' 나는 그 냉랭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서지유가 조금씩, 그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어딘가 초조하게 뒤를 살피는 듯한 기색도 섞여 있었다. 서지유를 홀로 두고 온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태자 전하, 오늘 유난히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짧은 대답 속에는 예전 같았으면 없었을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무뚝뚝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돌아서서 서지유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이 시점부터 그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알고 있던 미래가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걸 보는 건, 예상보다 훨씬 씁쓸한 일이었다. '알고 있었잖아. 놀랄 이유가 없다.' 황보진혁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저 소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 쪽에서 조사가 가능하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사람을 붙였습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이 남자는 늘 한 발 앞서 움직인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가 편해질수록, 방심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이제 시작이다.' 삼 년 전 각성한 그 미래가, 이제 조금씩 현실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의 화려한 조명 아래, 나는 서지유의 웃는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 시선을 느낀 듯, 아주 짧은 순간 이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왕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의 눈빛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이, 언젠가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언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 것인가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내가 얼마나 더 많은 걸 준비해둘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모든 걸 결정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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