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삼 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나는 겉으로는 여느 귀족 영애처럼 자수를 배우고 예법을 익혔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던 소규모 상단 하나를 조용히 사들여 내 이름을 숨긴 채 운영했다.
'가문의 재산에 손대는 순간 감시가 붙는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관리하지 않는 외곽의 작은 사업체들만을 골라 손을 뻗었다.
곡물 창고, 소규모 직물 공방, 변방의 광산 지분.
하나같이 눈에 띄지 않는 규모였지만, 모아놓고 보니 결코 적은 자산이 아니었다.
처음 상단을 넘겨받았을 때, 관리인은 내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서류만 훑었다.
어린 영애가 잠깐 흥미로 벌이는 일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오해가 편리했다.
관리인이 나를 가볍게 볼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곡물 창고의 재고량, 직물 공방의 실 수급처, 광산의 채굴량 변화까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사람은 얼마든지 웃으며 거짓을 말할 수 있지만, 장부에 적힌 숫자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보다 숫자를 믿기로 했다.
'가문이 몰락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 결심이 삼 년 동안 나를 움직인 유일한 동력이었다.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접어두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도, 지금 이 순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밤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촛불 아래에서 장부를 확인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손끝에 잉크가 마를 새 없이 묻어났고, 눈은 늘 뻑뻑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건 취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준비였으니까.
"아가씨, 요즘 부쩍 서류를 많이 보시네요."
시녀 하나가 내 방에 쌓인 문서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웃으며 문서를 덮었다.
"곧 왕태자비가 될 사람인데, 이 정도는 알아둬야지."
시녀는 그 말에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왕태자비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태자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초조함이 없지 않았다.
미래의 기억 속 무도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점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지유는 미래의 기억보다 조금 더 일찍 왕태자와 접촉을 시작한 듯 보였다.
소문에 따르면, 왕태자는 최근 몰락한 남작가의 여식과 자주 함께 다닌다고 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흥미로운 화젯거리로 오르내렸다.
"그런 소문으로는 남작가 영애가 왕태자님과 정원에서 단둘이 산책을 하셨다던데요."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신분 차이가 크지 않나요?"
"그래서 더 화제잖아요. 사랑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면서."
나는 그 대화를 듣는 내내 표정을 관리하는 데 온 신경을 써야 했다.
'예정보다 빠르다.'
나는 그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미래의 기억은 절대적인 지도가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상대도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서지유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 역시 더 빠르게, 더 확실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황보진혁 공작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의 일정, 그가 자주 방문하는 곳, 그가 신뢰하는 인물들.
하나씩 정보를 모으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정보를 모으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입이 무거웠고, 함부로 접근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단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은밀히 정보상을 고용했다.
정보상이 처음 가져온 정보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공작이 좋아하는 차의 종류, 즐겨 입는 옷의 색깔 같은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이런 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더 깊은 정보를 요구했고, 그 대가로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가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누구와 대립하는지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그러던 중,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왕실이 주최하는 소규모 다과회에 그가 참석한다는 소식이었다.
다과회 자체는 별다른 정치적 의미가 없는 자리였지만, 그런 자리일수록 사람들의 경계가 느슨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자리를 놓치면 안 된다.'
나는 다과회 참석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했다.
"요즘 왕실 분들과 자주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서하가 이제야 혼약자로서의 자각이 생겼구나."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기특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각이라니, 당신이 아는 자각과 내가 가진 자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당신은 죽는 날까지 모를 것이다.
다과회 당일, 나는 평소보다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섰다.
지나치게 눈에 띄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어서도 안 되었다.
'적당한 균형이 중요하다.'
그것이 삼 년간 내가 익힌 사교계의 법칙이었다.
옷의 색은 짙은 청록색으로 골랐다.
너무 화사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시선을 붙잡는 색이었다.
장신구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목걸이 하나, 그리고 어머니가 물려주신 작은 귀걸이 한 쌍이 전부였다.
지나치게 꾸미면 계산적으로 보일까 걱정스러웠고, 너무 소박하면 무관심하게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다과회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낯선 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짙은 색 예복을 입은 남자였다.
표정에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시선은 사람들을 훑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저울질하는 듯했다.
'저 사람이구나.'
황보진혁 공작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늘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손익으로 대하는 눈빛.
가까이서 보니 그의 손에는 미세한 굳은살이 있었다.
검을 쓰는 사람의 손이었다.
옷은 값비싼 천이었지만, 장식은 최소한이었다.
허례허식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성향이 옷차림에서도 드러났다.
'전형적인 실리주의자.'
나는 짧게 결론을 내렸다.
이런 사람에게는 감정에 호소하는 접근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나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삼 년 동안 준비한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섣불리 다가가면, 그저 야심 있는 귀족 영애로 보일 뿐이었다.
'기다려야 한다.'
나는 찻잔을 들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먼저 궁금해할 만한 무언가를, 오늘 이 자리에서 흘려야 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주변에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누구의 드레스가 이번 시즌 유행이라느니, 어느 백작가의 자제가 곧 혼인을 한다느니 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오로지 한 사람의 동선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황보진혁은 다과회장을 천천히 돌며 몇몇 인사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는 늘 짧았고, 형식적이었다.
상대가 흥미로운 말을 하지 않으면 금세 자리를 옮겼다.
'저 사람의 시간을 붙잡을 만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때, 다과회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한 귀족 부인이 최근 급등한 곡물 가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변방 광산 지역의 물류가 막혀서 그렇다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몇 마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상단이 손대고 있는 지역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장이 다시 한 번 빠르게 뛰었다.
이번에는 초조함이 아니라, 기대감이었다.
'이건, 내가 쓸 수 있는 카드다.'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그 부인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준비를 했다.
머릿속으로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빠르게 정리했다.
황보진혁의 시선이 마침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