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작님, 저랑 손잡을까요?

4화

"변방의 물류가 막힌 건 광산 지역의 도로 보수 문제 때문일 겁니다." 나는 부인들의 대화에 조용히 끼어들며 말했다. 순간 몇몇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찻잔을 든 부인들의 손이 잠깐 멈췄다. 누군가는 눈썹을 치켜올렸고, 누군가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걸었다. 다과회란 원래 이런 곡물 가격이나 도로 사정 같은 딱딱한 화제와는 거리가 먼 자리였다. "선우 영애가 그런 것도 아시나요?" 한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미묘한 견제가 섞여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는 상단 하나가 그 지역과 거래를 하고 있어서요." 목소리는 최대한 가볍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흘렸다. 일부러 흘린 정보였다. 곡물 가격 문제는 이미 조사해둔 사안이었고, 도로 보수 지연의 원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지식을 굳이 지금 꺼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남자가 듣고 있으니까.' 나는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도 황보진혁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의 무게가 유독 선명했다. 그는 다과회 구석, 병풍 근처에서 다른 대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의 방향은 이미 이쪽으로 반쯤 틀어져 있었다. 사람은 관심 있는 대상 쪽으로 발끝이 먼저 돌아간다더니, 딱 그 모양새였다. 부인들의 화제는 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누군가의 혼사 이야기, 어느 상단의 새 비단 이야기. 나는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수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정원으로 나가면, 따라올까.' 확신은 없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황보진혁이라는 사람은, 궁금한 것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나는 정원으로 잠시 나왔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겨울 초입의 공기는 살갗을 얇게 저미는 듯 차가웠고, 정원의 나무들은 이미 잎을 절반쯤 떨어뜨린 채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거운, 확신에 찬 걸음이었다. 돌아보니, 황보진혁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짙은 색 관복 위로 걸친 외투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표정은 여전히 감정을 읽기 힘들 만큼 담담했다. 북부의 실권을 쥔 공작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한 인상이었다. "선우 영애."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방금 하신 말씀, 상단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작께서 그런 사소한 이야기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네요." 속으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드디어 걸렸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지만, 손끝은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소한 정보가 아니지요. 왕태자의 혼약자가 왕실도 모르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건." 목소리에는 비난보다는 계산이 실려 있었다. 그는 지금 나를 위험 요소로 볼지, 이용 가치로 볼지 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초조함이 아니라 순수한 흥미를 읽어냈다. '경계보다 흥미가 앞선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사람은 두려운 대상보다 흥미로운 대상에게 마음을 여는 법이었다. "공작님, 저와 거래를 하나 하시겠습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거래라니, 어떤 거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목소리에 경계심이 살짝 섞였지만, 발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걸음 앞으로 다가온 듯한 느낌마저 있었다. "제가 아는 정보를 드리는 대신, 공작님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정원에는 우리 둘뿐이었지만, 벽에도 귀가 있다는 걸 늘 명심해야 했다. "삼 년 후, 왕태자와의 혼약이 파기될 겁니다. ㅡ그리고 저는 그 파기의 과정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변했다. 눈매가 가늘어지고, 팔짱을 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봐온 어떤 반응과도 달랐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면 끝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신뢰를 걸어야 했다. 어설픈 변명이나 애매한 대답은 오히려 그의 의심을 부추길 뿐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대답했다. "제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정원에 침묵이 흘렀다.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멀리서 시녀들의 웃음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실려왔지만, 이 정원 안의 공기만은 완전히 다른 온도였다. 황보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익숙하지만 낯선 종류의 시선이었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질 만큼 팽팽한 정적이었다. '믿지 않는다면 여기서 끝이다.' 나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최악의 경우 그는 나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로 여기고 자리를 뜰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위로 당겨졌다. 경멸이나 조롱이 아니라, 순수한 흥미가 만들어낸 움직임이었다. "흥미롭군요."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영애가 보여준 정보력을 고려하면 아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래를 안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나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그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확신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어떤 귀족도 이런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었다. 대개는 헛소리라며 웃어넘기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자리를 피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로지 확률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증명해보시죠." 그가 말했다. "영애가 미래를 안다면, 앞으로 한 달 안에 벌어질 일을 하나 맞혀보십시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딱 시험해보기 좋은 기간이었다. 너무 먼 미래를 말하면 검증할 수 없고, 너무 가까운 미래를 말하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한 달 안에 벌어질 일 중,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왕제파 소속의 후작 하나가 부정 축재 혐의로 조사받게 될 겁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ㅡ지금 말하면 공작님이 직접 손을 써서 미래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단순한 예측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었고, 그 사건이 정계에 미친 파장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 최소한의 정보만 흘리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흥미로운 조건이군요." 그는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까지 즉시 이해한 듯했다. "제가 틀리면, 저를 미친 여자로 여기시면 됩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가 맞으면, 그때 다시 거래를 이야기하시죠." 말을 끝내고 나서야, 내 손이 조금 차가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울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이 대화 자체의 긴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에는 더 이상 의심이나 조롱의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신중한 저울질이 남아 있었다. "좋습니다. 한 달 후에 다시 뵙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다음 만남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그가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유난히 커다랗게 느껴졌다. 저 넓은 등 뒤로 북부의 병력과 재력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첫 발은 뗐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미래의 기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전생의 기억이 언제나 정확했던 건 아니었다. 때로는 흐릿했고, 때로는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으며, 때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억처럼 완전히 비어 있기도 했다. 이번 후작의 부정 축재 사건 역시, 시기가 조금 어긋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정원의 바람이 다시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나는 옷깃을 살짝 여미며 고개를 들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금처럼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한 달 뒤, 그 후작의 부정이 정말로 드러난다면. 그 순간부터 황보진혁은 나를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야말로, 내가 삼 년 후의 파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다. 문제는, 만약 기억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가 단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불안을 애써 밀어내며, 다시 다과회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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