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금빛 심판의 영애

1화

탈랑— 종이 울렸다. 해동국 왕성 앞, 심판의 대(臺) 위에 나는 두 손이 묶인 채로 서 있었다. 발밑으로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고, 그 아래로는 수천의 백성들이 몰려와 있었다. 다들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왕태자의 연인을 괴롭힌 악녀가 어떻게 벌 받는지를 보러 온 얼굴들이었다. 웃긴 건, 나는 정말로 그런 적이 없었다. 손목을 묶은 밧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사흘째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감각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이제는 아픈 건지 그냥 저릴 뿐인 건지 구분도 안 됐다. 개복치도 이 정도로 약하진 않을 텐데. 스트레스로 자연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마저도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자연사할 시간도 없이 참수당할 판이었으니까. "이서윤. 그대는 강나영 양을 상습적으로 모욕하고, 하녀를 시켜 독을 넣게 하였으며—" 낭독하는 관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저 종이에 적힌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애초에 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독을 넣게 했다고? 나는 나영이랑 마주 앉아 차 한 잔 마신 기억도 없는데. 상습적으로 모욕을 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지. 내가 그 애 얼굴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인데 대체 언제, 어디서, 무슨 말로 모욕을 했다는 건지 나조차도 몰랐다. "전부 거짓입니다."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흘 밤낮으로 감옥에서 물 한 방울 못 마셨으니 당연했다. "저는 강나영 양을 만난 적조차 몇 번 없습니다. 태자 전하, 부디—" 시선을 들었다. 대 아래, 황금빛 의자에 앉은 그가 있었다. 이헌. 한때는 내 약혼자였고, 한때는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었던 사람.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를 보되 마치 벌레를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3년이었다. 그와 약혼한 지 3년, 그 시간 동안 나는 그가 웃을 때 어떤 모양으로 눈이 접히는지, 화가 나면 어느 쪽 관자놀이가 먼저 움직이는지까지 다 외웠다. 그런데 지금 저 얼굴에는, 내가 알던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낯선 사람. 아니, 낯선 사람보다도 못한, 벌레. "증거가 명확하다." 짧았다. 딱 한 문장이었다. 그 한 문장에 내 목숨이 결정되었다. "전하, 저는—" "강나영이 직접 증언하지 않았느냐. 그녀가 무엇 때문에 거짓을 말하겠느냐." 아, 그렇지. 나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는 모든 걸 이해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해가 되어 버렸다. 이헌은 나영을 사랑한다. 귀족의 파혼 절차 없이, 그저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없애 버리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파혼 위약금도 없고, 가문 간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무엇보다— 나영이 왕비가 되기 위한 장애물이 사라진다. 너무 깔끔한 살인 계획이라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반년 전부터 이헌의 서신이 뜸해졌고,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걸 그저 태자의 정무가 바빠졌나 보다 하고 넘겼다.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었던 걸까. 지금 와서 따져 봐도 답은 안 나온다.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인데 자기 객관화가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심판의 형을 자청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좌중이 술렁였다. 심판의 형은 아무나 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께 판결을 맡기는 형벌이자, 무죄라면 살아남고 유죄라면 그 자리에서 죽는, 사실상 자살 신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무고하다면, 신이 나를 살릴 거라는 확신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도둑처럼, 창녀처럼 매도당한 채로 죽게 될 뿐이었다. 최소한 마지막까지 발버둥은 쳐 보고 싶었다. 이대로 목이 잘리면, 사람들은 내가 죄를 인정해서 조용히 죽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건 죽는 것보다 더 억울했다. 죽어서도 억울한 채로 남는다는 것. 그게 뭔지 알아? 그냥 이렇게 끌려가듯 죽느니, 차라리 신 앞에서 한 번 더 발버둥 쳐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허락한다." 이헌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마치 내가 알아서 죽어 주겠다니 잘됐다는 투였다. 그 어조에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래, 저 사람은 이제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거다. 3년의 시간이 저렇게 가벼운 말투 하나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게, 허무하다 못해 웃겼다. 관중석 어딘가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나영이었다.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이헌의 옆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죄책감 같은 건 한 톨도 없었다. 오히려 안도가 보였다. 저 표정을 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헛짚은 건 아니었구나. 저 애가 다 계획한 거구나. 확신이 서니까 이상하게 덜 아팠다. 아니, 아프긴 한데, 그 아픔의 종류가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성검의 기사를 부르라." 관리가 외쳤다. 그 말과 동시에, 대 아래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짙은 청발, 깊고 푸른 눈. 허리에는 성검이 걸려 있었다. 한도윤. 올해로 열여덟, 성검의 기사이자 이 나라에서 이헌보다 더 인기가 많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 나는 그를 몇 번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어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성검의 기사라는 자리는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니었다. 신의 검을 다룰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은, 나라 전체에서 단 한 사람뿐인 존재. 그런 사람이 지금, 죄인 하나를 처형하려고 대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대 위로 올라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이 상황을 그리 즐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표정 뒤로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턱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 여기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럴 거다. 성검의 기사라는 게 지금 내 목을 치는 것 말고 다른 할 일이 없었을까.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짧은, 아주 짧은 순간. 말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뭔가를 느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따뜻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한테 이런 감상은 사치인데, 그 짧은 눈빛 하나가 사흘 동안 아무도 주지 않았던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이없게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 그런 감상을 느끼고 있다니. 내가 미쳤나. 지금 이 상황에 누군가의 눈빛에 온도를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신이 어디로 나가버린 증거 같았다. 그래도 뭐, 어차피 곧 죽을 몸인데 마지막으로 따뜻한 걸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었다. "심판의 형을 집행하라." 이헌의 목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도윤이 성검을 뽑았다. 검신에서 옅은 금빛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응답하듯 미약하게 울렸다. 뭐지, 이 느낌은. 마치 검이 내게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을 깨우는 것처럼,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게 울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죽기 직전에 몸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검이 뭔가를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 질문의 답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도윤의 검이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 군중의 함성이 커졌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함성이었다.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서 나를 향해 쏟아졌다. 이상하게도 그 함성 속에서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멀어지고, 오직 저 검신의 금빛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검이 내려오기 직전, 나는 아주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내 발밑에서, 옅은 금빛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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