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천장이 낯설다는 사실이었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른 화려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고, 넝쿨무늬가 촘촘히 얽힌 그 장식 사이사이로 작은 보석들이 박혀 있어 아침 햇살이 스칠 때마다 별처럼 반짝였는데, 그 아래 늘어진 새하얀 캐노피가 바람도 없는데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숨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흔들리는 그 천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은은 문득 이 모든 풍경이 스물다섯 해를 살아온 자신의 기억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말았다.
'……여기 어디지.'
속으로 되물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팔이 이상하게 짧다는 것을 깨닫고 나은은 숨을 삼켰다. 마치 팔이 절반쯤 잘려 나간 듯한 그 낯선 감각에 소름이 돋았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작았다.
손가락 마디 하나까지도 앙증맞게 작은, 분명 성인의 것일 수 없는 그 손을 몇 번이나 뒤집어보며, 나은은 손톱 끝의 여린 반달 모양까지도 낯설게 느끼며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이건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아무리 다시 봐도,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이건 성인 여자의 손이 아니라 갓 걸음마를 뗀 아이의 손이었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은은 사고가 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참이었고, 신호는 분명 초록불이었으며,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라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까지 선명히 기억났는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헤드라이트 불빛과 귀를 찢는 경적 소리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통증도, 소리도, 그 어떤 감각도 남지 않은 채 시간이 통째로 잘려나간 것처럼 뚝 끊겨버렸다.
'죽은 건가, 나.'
담담하게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고, 나은은 몸을 일으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샹들리에 아래로 늘어진 크리스탈 장식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부서지듯 반짝였고, 화려한 자개 장식이 새겨진 화장대와 그 위에 놓인 은빛 손거울,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옷장까지, 방 전체가 부유한 귀족 가문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벽에는 낯설지 않은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는데, 그 문장을 알아본 순간 나은은 다시 한번 숨을 멈추고 말았다.
선우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독수리가 장미 넝쿨을 움켜쥔 그 문장은, 나은이 생전에 수백 시간을 쏟아부었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천유제국의 장미〉에서 몇 번이고 로딩 화면에 등장했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며 짬짬이 켰던 그 게임,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그 게임의 문양이 어째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인지 나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나은은 침대에서 내려섰고,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 크기의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져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 바닥의 서늘함마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몇 번이나 손을 허공에 저어야 했다.
분명 자신은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지금 이 몸은 일곱 살, 어쩌면 그보다도 더 어린 소녀의 몸이었다. 침대 옆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나은은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은빛에 가까운 백금발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고, 자수정처럼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나은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게임 속 스틸컷마다 등장했던, 냉혹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여주인공을 괴롭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인자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오며 나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열이 많이 나셨는데 좀 더 누워 계셔야……"
여자의 손이 이마에 닿는 순간 나은은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고, 게임 초반 튜토리얼 대화창에서 몇 번이나 등장했던 그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흘려버렸다.
"최말순……"
여자의 눈이 순간 커졌다.
"아가씨, 제 이름을 어떻게……"
당황한 목소리에 나은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고,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최말순이라는 이름은 게임 속에서도 몇 번밖에 언급되지 않는, 조연 중에서도 조연에 불과한 유모의 이름이었는데, 그런 이름을 처음 눈을 뜬 아이가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나은도 뒤늦게 실감했다.
'침착해. 여긴 게임 속 세계고, 나는 지금 선우아린이야. 그 악역 영애.'
속으로 되뇌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최말순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나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걱정과 의심이 반쯤씩 뒤섞여 있어서, 나은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우아린. 그 이름을 속으로 되씹을수록 나은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천유제국의 장미〉에서 선우아린은 여주인공 유하은을 끝없이 괴롭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악역 영애였다. 초반부에는 황태자와의 혼약을 무기로 여주인공을 압박하고, 중반부에는 온갖 계략을 꾸며 여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리지만, 결국 그 모든 계략이 밝혀지며 파혼당하고 가문에서도 버림받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의 몸에 지금, 자신의 정신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은 나은—아니, 이제는 선우아린이라 불려야 할 그녀의 심장을 더욱 세게 죄어오는 것이었다.
"아린, 몸은 좀 어때?"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선 소년의 모습을 본 순간, 아린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청람색 머리카락이 창으로 스며든 햇살에 물결처럼 흩날렸고, 이지적인 푸른 눈동자는 가을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맑았으며, 오뚝한 콧날 아래로 자리한 입술은 잘 그려진 그림처럼 단정한 선을 이루고 있었다. 또래 아이답지 않은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그 소년은, 게임 속에서 수십 장의 일러스트로 그려졌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황태자 이하준.
원작 게임에서 성녀 유하은을 선택해 아린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종국에는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남자주인공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나은은 이 캐릭터의 루트를 몇 번이나 클리어했었고, 그때마다 화면 속에서 아린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엔딩을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이야기의 시작점에 자신이 서 있었다.
'벌써 만났다고…….'
예상보다 이르게 마주친 상대에 아린은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게임의 초반 대화 장면이 통째로 떠오르며 입술이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말았다. 마치 몸이 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이렇게 병문안을 오시다니, 소녀는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일곱 살 아이의 목소리로 흘러나온 지나치게 격식 있는 어른의 대사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하준의 눈이 커졌고, 최말순은 숨을 삼킨 채 아린을 내려다보았으며,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아린 자신도 뒤늦게 아차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대체 왜 하필 그 대사가, 그토록 오만하고 형식적인 말투가 튀어나온 것인지 아린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게임 속에서 무수히 반복해서 읽었던 대사들이 몸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불려 나온 것 같았다.
'망했다……'
속으로 절규하듯 되뇌는 동안, 이하준은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걸음걸이는 일곱 살배기 아이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느긋하고 침착했으며, 마치 상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 아린의 얼굴에 곧게 꽂혔다.
"……아린, 지금 그 말투는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