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이 지나고, 아린은 조금씩 이 몸의 감각과 이 세계의 규칙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스며드는 낯선 공기의 냄새도, 손끝에 닿는 비단 이불의 매끄러운 감촉도,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렇게 몸이 이 세계에 적응해 가는 동안 아린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적응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했던 것은 게임 속에서 그토록 많이 다뤄졌던 최말순의 존재였다.
원작 게임에서 최말순은 짧게 스쳐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했고, 스토리 진행상 몇 번의 대화창을 거쳐 이름과 얼굴을 겨우 익힐 수 있을 정도의 비중밖에 없었지만, 아린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만큼은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아린은 텍스트로만 읽었을 때보다 실제로 곁에서 지내보며 새삼스레 다시 느끼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저 '유모'라는 직함으로만 설명되던 인물이, 실제로는 아린이 눈을 뜰 때마다 가장 먼저 방문을 두드리고, 밥을 먹을 때마다 국이 식지 않았는지 손등으로 확인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보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린은 이곳에 온 지 며칠 만에 완전히 체감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었나.'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아린은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게임 속 데이터로만 존재했던 사람을 이제는 실제 감정을 지닌 존재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낯선 무게감이었다.
그날 오후, 아린은 정원에서 유모와 함께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햇살이 정원의 잔디 위로 부드럽게 흩어지고 있었고, 화단 끝에서는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옅은 향기를 흘려보내고 있었으며, 최말순은 그 옆에서 양산을 받쳐 든 채 아린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은 안색이 조금 좋아지셨네요."
최말순이 미소를 지으며 건넨 그 말에, 아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는데,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아직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탓에 매번 말투와 표정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롭던 정원의 산책은 저택 뒤편 마구간 근처에서 벌어진 소란으로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히이이잉!
말이 풀려나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고, 하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아붙이려 했지만 겁을 먹은 말은 더욱 거세게 발버둥 치며 사방으로 흙먼지를 흩뿌리고 있었다.
말고삐가 어딘가에 걸려 끊어진 흔적이 보였고, 안장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채 흘러내려 있는 모습으로 보아, 누군가의 실수로 매어놓은 끈이 풀렸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놀라 날뛰게 된 모양이었는데, 그 원인을 따질 겨를도 없이 말은 곧장 아린과 최말순이 서 있는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가씨, 뒤로 물러나세요!"
최말순이 다급하게 외치며 아린을 감싸안는 순간, 말의 앞발이 그녀들 쪽으로 크게 튀어 올랐고, 최말순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아린을 완전히 가리며 등을 돌렸다.
아린은 그 짧은 순간에도 최말순의 팔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두려움을 참으면서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떨림이었다.
쿵!
말발굽이 바로 옆의 나무 울타리를 부수는 소리가 울렸고, 그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린은 최말순의 품 안에서 온몸을 떨었다.
귓가에는 하인들의 비명과 말의 거친 콧숨 소리가 뒤섞여 어지럽게 울려 퍼졌고,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최말순의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아린의 뺨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말을 제압했지만, 그 짧은 순간 최말순의 등이 나뭇조각에 긁혀 붉은 상처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옷감이 살짝 찢어진 틈으로 붉은 줄이 선명하게 배어 나오는 것을 본 순간, 아린은 숨을 삼키며 손을 뻗었지만, 최말순은 그런 아린의 손길보다 먼저 자신의 어깨를 낮추며 아린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다치신 곳은……"
자신의 상처보다 아린의 안전을 먼저 확인하는 그 목소리에, 아린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아린은 최말순의 손을 꼭 붙잡았고, 그 손등에 남은 흙먼지와 작은 생채기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을 애써 눌러 삼켰다.
그러나 그 안도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자,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서늘한 불안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원작 게임의 스토리 안에서 최말순이 크게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장면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게임의 텍스트 속에서 최말순은 항상 안전한 배경 속에서만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몸을 던져 아린을 구하는 장면 같은 것은 어떤 루트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아린이 알던 원래의 흐름과 지금 이 순간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다르게 행동하면, 주변 사람들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어.'
그 생각은 반가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몰고 왔는데, 반가운 이유는 그만큼 결말을 바꿀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고, 두려운 이유는 그 변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늘의 이 작은 사고가 원작에는 없던 일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다른 사건들 역시 아린이 알던 지식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쥐고 있던 유일한 무기 하나가 무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방으로 돌아온 아린은 침대에 걸터앉아 낮의 일을 곱씹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노을빛이 방 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깔이 마치 최말순의 등에서 배어 나오던 상처의 색깔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아린은, 문득 대학 시절 유나에게 이용당했던 또 다른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졸업을 앞둔 학기, 나은은 교수의 추천으로 얻어낸 인턴십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달간 밤을 새워가며 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교수 앞에서 몇 번이나 발표 연습을 반복했으며,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다른 동기들이 놀러 다니는 시간에도 도서관 구석 자리를 지켰던 나은에게, 그 인턴십은 단순한 스펙 한 줄이 아니라 앞으로의 진로 전체가 걸린 기회였다.
서류 심사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나가 찾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매달렸다.
"나은아, 나 이번에 진짜 급해서 그런데……. 그 자리 나한테 한 번만 양보해줄 수 없을까? 너는 기회가 또 있을 거잖아."
유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은의 손을 붙잡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은은 차마 매정하게 거절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저 눈물이 진짜일까, 아니면……'
그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은은 그 의심을 애써 눌러 삼키며 유나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빼고 유나를 추천해주었다.
유나는 그 인턴십을 발판으로 이후 원하는 회사에 정식 입사까지 하게 되었고, 나은에게는 다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훗날 회사 동기들 사이에서 그 인턴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유나는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실력으로 얻어낸 자리인 것처럼 웃으며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옆에서 나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씁쓸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때도 나는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 물음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린은 씁쓸하게 웃었고, 이번 삶에서는 절대로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을 아무렇게나 남에게 내어주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밤, 아린은 최말순의 상처를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이번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그 다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아린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스스로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약속을 내뱉은 자의 불안한 떨림이었다.
그리고 그 밤, 아린은 알지 못했다.
최말순의 등에 남은 그 작은 상처가, 앞으로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질 훨씬 더 크고 위태로운 일들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