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결말, 내가 바꾼다

5화

빛무리의 잔상이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린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신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 커튼 자락을 흔들었지만, 아린의 시선은 여전히 저 먼 신전의 첨탑 끝에 매달려 있었고, 그 첨탑 위로 흩어졌던 금빛 잔광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듯한 감각이 계속되었다. '벌써 시작된 거야.' 속으로 되뇌며 아린은 지난밤의 악몽과 오늘 목격한 빛무리를 이어 붙였고, 그 둘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확신이 점점 짙어졌다. 지난밤 꿈속에서 아린은 낯선 신전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의 주인이 다름 아닌 이하준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여인이 유하은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소름이 다시 한번 훑고 지나갔다. '꿈이 예언이었다면……. 아니, 예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미래를 미리 본 것뿐이라면.' 원작 게임의 서사는 신성력을 각성한 유하은이 신전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녀가 신전에서 자라며 이하준을 비롯한 여러 후보군과 접점을 만들어가다가, 결국 열일곱 살이 되는 해에 이하준을 선택함으로써 아린의 파국이 완성되는 구조였다. 그 구조를 몇 번이나 되짚어보아도 결말은 언제나 같았고, 그 결말의 끝자락에는 이하준의 검이 아린의 가슴을 겨누는 장면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아니, 사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도 같고.' 일곱 살인 지금부터 열일곱까지, 십 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십 년이 결코 넉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원작 스토리의 흐름이 이미 이 세계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며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하나씩 정리해보았다. 발끝이 카펫 위를 오갈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마치 아린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생각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원작 게임에는 유하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남성 후보가 이하준 외에도 여럿 존재했는데, 황궁 소속의 젊은 기사, 신전에 소속된 마법사, 뒷골목 출신의 은밀한 암살자, 그리고 인접국에서 유학 온 왕자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인물들이 유하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변수로 남아 있었다. 기사는 성실하고 올곧은 성정으로 유하은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주는 루트였고, 마법사는 신전 내에서 그녀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학문적 교감을 나누는 루트였으며, 암살자는 위험하고 어두운 과거를 지닌 채 그녀를 통해 구원받는 루트였고, 왕자는 이국적인 신분 차를 뛰어넘어 사랑을 완성하는 루트였다는 것을, 아린은 대학 시절 몇 번이나 반복해서 플레이했던 기억을 더듬어 하나씩 되짚었다. '저 넷 중 누구라도 유하은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면, 이하준을 향한 루트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야.' 그 생각에 다다르자 아린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고, 이제는 단순히 운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판을 흔들어야 한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야.' 그 확신을 곱씹으며 아린은 창가에서 물러나 책상 앞에 앉았고, 어린아이의 손으로는 아직 서툴게 쥐어지는 펜을 들어 종이 위에 몇 개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는데, 그것은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린 자신의 심장이 그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사의 이름, 마법사의 이름, 그리고 아직 이 세계에 등장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암살자와 왕자의 존재까지, 아린은 원작 게임의 기억을 최대한 끌어모아 하나씩 되짚었다. '기사 루트의 남자는 분명 열두 살 무렵에 황궁 기사단에 견습으로 들어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거야.' '마법사 쪽은 신전 소속이니 접근하기가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 문제는 암살자와 왕자야. 그 둘은 등장 시점 자체가 늦은 편이었으니까.' '가장 먼저 접근해야 할 건 신전 쪽이겠지. 유하은이 자라는 곳이니까.' 계획을 세우는 아린의 손끝이 떨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만에 느끼는 통제감 때문이었고, 그 감각은 대학 시절 늘 남의 뒤에서 밀려나던 나은에게는 낯설고도 짜릿한 것이었다. 그때의 나은은 조모임에서 발표를 맡아도 늘 목소리가 가장 늦게 나왔고, 동아리 활동에서도 늘 누군가의 뒤에 서서 손을 들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던 사람이었으며, 그런 나은이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종이 위에 이름을 적어가며 한 세계의 운명을 뒤흔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엔 내가 판을 짜는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아린은 종이 위에 적힌 이름들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고, 그 이름들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 기둥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똑똑.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최말순이 들어섰고, 그녀의 손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진 초청장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최말순은 아린이 태어났을 때부터 곁을 지켜온 유모였는데, 늘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방을 오가던 그녀가 오늘은 어쩐지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빠르고 조심스러워서, 아린은 종이를 슬쩍 소매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가씨,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이에요." 그 말에 아린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황실에서 직접 보낸 서신이 공작가에 도착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더군다나 봉투에 찍힌 봉인이 예식용이 아니라 정무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아린의 등줄기를 따라 다시 한번 서늘한 예감이 지나갔다. '왜 갑자기 폐하께서……. 설마 벌써 뭔가 잘못된 건가.' 봉투를 뜯는 손끝이 자꾸만 미끄러졌고,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봉인을 뜯어낸 아린은 안에 접혀 있던 종이를 펼쳤다. 서신에는 짧고 단호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선우 공작가와 황실 간의 혼약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눈이 글자를 그저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지만, 두 번째로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온전히 머릿속에 박혀 들어왔고,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원작 게임 어디에도 이렇게 이른 시점에 혼약이 흔들린다는 서술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낯선 문장 앞에서 아린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시작하기도 전에 어긋나버릴 수 있다는 서늘한 예감에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혼약이 재검토된다니……. 이건 원작에 없던 전개야. 그런데 왜, 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 최말순은 아린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챈 듯,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그러나 아린은 그 물음에 곧바로 답하지 못한 채, 서신을 쥔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아까와 똑같은 방향에서 여전히 신전의 첨탑이 고요히 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믿고 계획을 세우려 했는데, 그 전제가 벌써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거야.' 혼약이 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선우 공작가의 위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아린이 유하은과 이하준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발판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무슨 이유인지부터 알아내야 해.' 아린은 다시 한번 서신을 내려다보았고,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앞으로 자신의 십 년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장의 떨림을 느낀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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