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빗길이었다.
신호는 분명 초록이었다. 나는 우산을 접으며 횡단보도에 발을 디뎠다. 원래 우산 접는 타이밍이 문제였다는 걸 나중에라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클랙슨이 고막을 찢고, 그다음엔 몸이 붕 뜨는 감각이었다. 아, 이거 죽는구나. 그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픔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사람이 죽을 때 이렇게 조용한 건가. 최소한 영화에서는 슬로모션이라도 나와줬는데.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낯설었다.
새하얀 캐노피가 침대 위로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지나치게 화사했다. 병원인가. 아니, 병원이라기엔 이 침구가 너무 비싸 보였다. 이불에서 나는 냄새조차 고급스러웠다. 유럽 어느 호텔 조식 광고에서 봤을 법한 그런 냄새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는데 손끝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금빛이었다.
금발.
나는 흑발이었는데.
한 번 더 만져봤다. 여전히 금발이었다. 세 번째로 만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했다. 손을 더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자 손등의 피부가 지나치게 하얗고 손가락은 가늘었다. 마우스도 제대로 못 잡을 것 같은 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옆에 놓인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엔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오키드색 눈동자, 금발, 인형처럼 정돈된 얼굴. 내 얼굴이 아니었다. 내 얼굴은 이렇게까지 비율이 좋지 않았다. 눈이 이렇게 크지도 않았고, 코가 이렇게 오뚝하지도 않았다. 억울했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얼굴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죽고 나서야 갖다니.
"…뭐야 이거."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정보의 홍수였다. 게임 로딩 화면이 5초 만에 끝나는 것처럼, 낯선 기억들이 순식간에 뇌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서연이라는 이름. 공작가라는 위치. 시녀들의 얼굴과 이름. 이 방의 구조. 이 저택의 정원사가 키우는 장미 품종. 그리고—
게임.
이건 게임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예전에 몇 번이나 돌렸던 연애 시뮬레이션, '황혼의 노래, 그대를 그리며'. 대학 때 새벽 세 시까지 붙잡고 있던 그 게임이었다. 공략 루트별로 세이브 파일을 열 개도 넘게 만들어놨던, 그 게임 속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이 얼굴, 이 이름, 이 금발과 오키드색 눈동자는—
악역 영애.
그것도 그냥 조연급 악역이 아니라, 게임 오프닝부터 3개월 뒤 처단 엔딩까지 확정되어 있는, 그 이서연이었다. 유저들 사이에서 별명이 뭐였더라. '삼개월 시한부'였나. 아니면 '단두대 직행 티켓'이었나. 커뮤니티에서 밈으로 돌아다니던 그 캐릭터가 지금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와.
나는 거울 속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예쁘긴 했다. 억울하게 예뻤다. 이렇게 예쁜 얼굴로 죽어야 한다니 그것도 나름의 코미디였다. 로또 1등 당첨 통지서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종이였다는 느낌.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유통기한이 아니라 애초에 사용 기간이 3개월로 박제된 상품권이었다.
머릿속에서 게임 오프닝 장면이 재생됐다. 왕태자 이신우와 이서연의 파혼식. 이서연이 왕태자의 뺨을 때리며 소리치는 장면, 그 뒤로 이어지는 온갖 악행 몬타주—시녀를 학대하고, 여주인공을 괴롭히고, 결국 왕실 모독죄로 끌려가는 결말까지. 유저들은 그 장면을 스킵하려고 애썼지만 스킵 버튼이 유독 그 부분만 늦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다들 욕을 했다. 그게 지금 내 이야기가 됐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쳤다. 등을 펴고, 턱을 살짝 들고, 표정을 무심하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라도 아는 척은 해야 했다. 최소한 이 순간을 넘겨야 다음 순간이 왔다. 시험 답안지 첫 문제를 몰라도 일단 이름은 써놔야 하는 것처럼.
들어온 사람은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시녀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머릿속 기억 창고를 뒤졌다. 이서연을 오래 모신 시녀였다. 표정이 조심스러웠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제 늦게까지 다과회 준비로 무리하셨잖아요. 몸은 좀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게 최선이었다. 말을 잘못 섞으면 바로 정체가 들통날 것 같았다.
"…괜찮아."
목소리가 낯설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높고 가는, 열다섯 살 소녀의 목소리. 그런데도 시녀는 아무 의심 없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었다. 최소한 이 몸의 원래 주인과 말투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런데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3개월. 정확히 오늘부터 3개월 뒤, 4월의 청연 귀족 학원 개학식 날, 나는 단두대 비슷한 자리에서 처단당한다. 이유는 단 하나, 왕태자의 혼약자였다가 버려진 여자라는 것. 게임 속에서는 그 장면이 무려 컷씬으로 나왔다. 배경 음악까지 슬픈 현악곡으로 깔려 있었다. 유저 후기 게시판에는 '이서연 죽는 거 보고 처음으로 악역한테 감정 이입했다'는 댓글이 몇 백 개씩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 이입의 대상이 지금 나였다.
그것도 잘못은 전부 왕태자가 저질렀는데 말이다.
파혼 통지도, 배신도, 이서연을 궁지로 몰아넣은 모든 사건도 그 자식이 벌인 짓이었다. 그런데 죽는 건 이서연 혼자였다. 게임 시나리오라는 게 원래 그렇게 불공평하게 짜여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내 목숨이 될 줄은 몰랐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돌렸다. 3개월. 90일 정도. 그 안에 뭔가를 바꿔야 했다. 파혼 시점을 늦추든, 왕태자와의 관계를 끊어내든, 아니면 아예 이 저택을 벗어나든. 뭐든 좋았다. 살 방법이 있다면.
젠장.
시녀가 조식을 준비하겠다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 봤다. 오키드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얼굴이 3개월 뒤 단두대에 오르는 장면을, 나는 게임 화면으로 몇 번이나 스킵하려다 실패했었다. 이제는 스킵 버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