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공작의 집무실 문 앞에 서는 순간부터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살짝 떨렸다.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문을 밀었다.
집무실은 넓고 서늘했다. 벽마다 걸린 초상화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근엄한 얼굴들. 아마 이 가문의 조상님들이겠지. 저분들도 살아계셨을 때 이렇게 억울하게 불려온 자손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공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보다가 나를 힐끗 올려다봤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이미 답이 정해진 심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그 아이를 때렸다고 들었다."
다짜고짜였다. 인사도, 안부도 없이 바로 본론.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때렸다니, 누구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이서연의 기억을 뒤졌다. 그런데 최근 며칠 사이의 기억이 유독 흐릿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빙의 직전의 이서연이 정말로 뭔가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전혀 담담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하녀 하나가 얼굴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네가 화병을 던졌다는 증언이 있는데."
와.
이거 완전 옛날 이서연이 저지른 일이구나. 근데 지금 그 죄를 뒤집어써야 하는 건 나였다. 게임 속 서브 히로인이 저지른 온갖 사고를 현실의 나, 즉 대체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니. 이건 무슨 콜센터 대타 근무도 아니고.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증인이 셋이다."
"증인이 셋이면 진실입니까?"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서연이라면 이렇게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을 거다. 원작 캐릭터답게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질러야 했다. 발을 구르고, 울음을 터뜨리고, "제가 왜 그런 짓을 했겠어요!" 하고 소리치는 게 이서연다운 반응이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이미 현대인의 화법으로 말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억울한 누명 쓰면 이렇게 말하잖아. 증거 있냐고, 증인이 있다고 해서 그게 곧 사실이냐고.
공작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도 지금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거다.
"…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버님, 저는 그저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말만 믿고 저를 벌하시려는 겁니까?"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했다. 살면서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공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벽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시간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일주일간 별채에 머물러라. 근신이다."
결국 그렇게 정리됐다. 억울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최소한 감옥에 가거나 매를 맞는 처벌은 아니었으니까. 이 세계의 처벌 수준을 아직 모르는 나로서는 일단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등 뒤로 공작의 시선을 느꼈다. 뭔가 관찰하는 듯한, 의심 어린 눈길. 저 사람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게 분명했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상대가 하나 더 늘었다는 뜻이었다.
별채로 가는 길에 하녀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복도 모퉁이마다 서너 명씩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가씨가 또 사고를 쳤다며."
"이번엔 왕태자님도 안 나서주실 것 같던데."
"근신이라니, 저번보단 약한 처벌 아니야?"
"그래도 이번엔 사람이 다쳤잖아. 얼굴에 흉터까지 남았다는데."
웃긴 게, 이서연은 이미 이 가문 안에서도 미운 오리였다. 아무도 그녀를 변호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하녀들도, 심지어 오빠라는 존재조차 이서연을 외면했다. 원작에서는 그냥 서사를 위한 배경 설정이었는데, 지금 이 몸으로 겪으니 그게 다 실제였다. 텍스트 몇 줄로 처리됐던 "가문 내에서 고립된 이서연"이라는 설정이, 지금 내 발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선과 목소리로 재생되고 있었다.
별채에 도착해서야 나는 진짜 문제를 자각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다. 3개월 시한 처단 운명에 더해서, 지금 당장 이 저택 안에서도 나는 고립된 상태였다. 게임 속에서는 서브 히로인 이서연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냥 스킵하면서 봤는데, 지금은 그 몰락의 한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별채는 본관보다 훨씬 낡고 어두웠다. 창문 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방 안에는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었고, 벽지는 색이 바래 있었다. 이런 데서 일주일이나 있으라고?
밤이 되자 배가 고파왔다. 근신 중이라 식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녁상이라고 나온 건 식은 빵 한 조각과 물 한 잔이 전부였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만 있어도 감사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3개월이 아니라 3일 안에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게임 속 정보가 다시 하나 떠올랐다. 이서연이 처단당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 바로 이 하녀 폭행 사건이었다. 게임 텍스트 로그에서 짧게 언급됐던 사건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스크롤을 내리면서 지나쳤던 몇 줄짜리 설정 텍스트였는데.
그럼 이 사건 이후에 뭐가 일어나지?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게임 속 로그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이서연 관련 이벤트, 처단 엔딩으로 가는 플래그들, 왕태자와의 관계, 하녀들과의 갈등.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들을 억지로 붙여봤다.
맞다, 이 하녀가 나중에 왕궁에 이서연에 대한 증언을 하러 간다. 그 증언이 처단의 결정적 증거 중 하나로 쓰인다. 게임 텍스트에서는 "하녀 A의 증언"이라는 짤막한 문구로만 처리됐던 부분이었다. 그게 지금 이 하녀였다.
이걸 지금 막을 수 있다면.
갑자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거였다. 게임 지식을 활용하면,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다는 것. 이건 그냥 저주받은 서브 히로인의 몸에 갇힌 게 아니라, 어쩌면 치트키를 하나 쥐고 있는 셈이었다.
이건 그냥 절망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결심했다. 이 게임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야 했다. 어떤 사건이 언제 터지는지, 누가 어떤 증언을 하는지. 그걸 다 기억해내야 했다. 시험 전날 밤샘 공부하듯, 머릿속에 남은 게임 정보를 하나씩 끄집어내 정리해야 했다. 이번엔 성적이 아니라 목숨이 걸린 시험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하녀를 만나야 했다. 오늘 밤 안에.
문제는, 근신 중인 내가 어떻게 별채를 빠져나가 그 하녀를 찾아낼 것인가였다. 창밖을 보니 달빛이 희미하게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틀에 손을 얹고 밖을 살폈다. 별채 뒤편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어둠 속에 겨우 보였다. 저 길로 나가면 하녀들이 머무는 별동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긴장.
창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