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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눈을 뜨자마자 쏟아진 기억을 정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아니라 정보였다. 마치 누가 내 머릿속에 USB를 꽂고 파일을 통째로 밀어넣은 것 같은 느낌. 두통도 없고 어지럽지도 않은데, 알아야 할 것들이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떠올랐다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이름, 가문, 나이, 말투, 습관, 그리고—게임 설정. 그렇다. 게임 설정. 이서연. 청연 왕국 유일의 공작가, 이가의 외동딸. 왕태자 이신우와 어릴 적부터 정혼한 사이. 게임 속에서 콧대 높고 신경질적이고, 남주인공을 향한 집착으로 여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전형적인 악역 영애. 이름만 들어도 유저들 사이에서 욕 좀 먹었던 캐릭터였다. 나도 그랬다. 얘 왜 저래, 진짜 별로다, 라고 생각하면서 스토리를 클릭했었다. 그리고 결말에서— 왕태자 이신우는 혼약자가 있는 몸으로 남작가의 영애, 한소이와 정을 통한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학원 축제 한복판에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손을 잡고 웃는 그 CG 한 장. 유저들 사이에서 명장면으로 꼽혔다. 이서연은 그 사실을 알고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온갖 죄를 뒤집어쓰고 처단당한다. 독살 시도, 폭행 교사, 심지어 살인 미수까지. 게임 내에서 그 모든 게 진짜 이서연이 저지른 일인지, 누군가 뒤집어씌운 일인지는 끝까지 애매하게 처리된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이신우는 무죄, 이서연은 처형. 와, 이거 진짜 개연성 없다고 생각하면서 플레이했었는데. 그때는 그냥 스토리 진행 버튼이나 누르면서, 팝콘 대신 편의점 감자칩 뜯어 먹으면서 킬킬거렸던 장면이었다. 캐릭터 하나 죽는다고 뭐 어떻겠어. 어차피 스크립트고, 어차피 픽션이고, 어차피 다음 챕터로 넘어가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 개연성 없는 결말의 당사자가 나였다. "아가씨, 어디 편찮으세요? 아침부터 안색이 안 좋으신데." 방금 들어온 시녀가 물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 속을 뒤적여봤지만 이서연은 시녀 이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던지, 아무리 뒤져도 정확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만, 그것도 흐릿하게. 이서연 이 인간, 참 곱게 자랐구나 싶었다. 곱게 자란 게 아니라 그냥 남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겠지만. "괜찮다." 짧게 대답하고 손을 저었다. 시녀는 몇 번 눈치를 보다가 결국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진짜 절망이 왔다. 3개월. 그 안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나는 목이 잘린다. 게임 속 확정된 엔딩이었다. 회귀도 아니고 리셋도 없다. 세이브 파일도 없고 치트키도 없다. 그냥 3개월 뒤에 죽는다는 사실만 확정되어 있는 채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했다. 원작 게임의 첫 시작이 정확히 여기서부터였다. 겨울, 이서연의 열네 살 생일이 지난 직후. 그리고 4월 학원 입학식 날, 이신우와 한소이의 스캔들이 폭발하고, 이서연이 그 자리에서 온갖 만행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그대로 처단된다. 봄에 벚꽃 흩날리는 CG 배경으로. 미친 거 아닌가, 사람 하나 죽는 장면을 저렇게 예쁘게 그려놓다니. 웃긴 건 게임 속에서 이서연이 실제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거였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논란이었다. 커뮤니티 게시판만 뒤져봐도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저 여자가 진짜 나쁜 년인지, 아니면 그냥 버려진 정혼자라는 이유로 온갖 죄를 뒤집어쓴 희생양인지. 근거 있는 증거는 하나도 안 나오고, 정황과 소문과 감정만 쌓여서 처형대까지 끌려가는 구조였다. 나는 후자에 걸고 싶었다. 걸고 싶은 게 아니라 걸어야 했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지금 이 순간 내 목숨이 걸려 있는데 개연성 타령할 처지가 아니었다. "3개월." 혼자 중얼거려봤다. 발음해보니 더 짧게 느껴졌다.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마치 카드값 결제일 다가오는 걸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거보다 훨씬 심각하지. 카드값은 연체하면 신용불량이고 이건 연체하면 목이 날아가는 거니까.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뭔가를 바꿔야 했다. 이신우와의 혼약을 없애든가, 그게 안 되면 처단당할 죄목 자체를 만들지 않든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몇 개 그려봤다. 혼약 파기 신청, 학원 입학 연기, 아니면 그냥 도망— 근데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창밖에서 아버지, 이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낮게 가라앉은, 그렇지만 분명히 짜증이 섞인 음성. 이서연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원래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딸에게 애정보다는 정치적 가치를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정혼 상대가 왕태자라는 것도, 딸의 마음보다는 가문의 위상 때문에 반가워했던 인간이었다. "이서연을 당장 불러오라." 문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한 번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직 정신 차린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설마 벌써? 3개월짜리 타이머가 벌써 앞당겨지는 건가. 게임 시작 시점도 아직 안 됐는데 뭔가 스크립트가 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경로 재탐색하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뭔가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저, 아가씨. 공작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시녀가 다시 들어와 하는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게 몸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시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평소보다 눈을 못 마주치고, 말도 빠르게 흘리듯 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물어봤지만 시녀는 고개만 저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아가씨. 그냥 지금 당장 오시라고만—"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시녀는 시선을 떨궜다.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 말을 못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그러니 일단 가야 했다. 옷매를 대충 추스르고 방문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 발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원래 이서연의 방이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내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다른 소리가 다 죽어버린 건가. 아버지의 서재로 이어지는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서연의 기억에도 없는 목소리. 문 앞에 선 채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3개월도 아니고, 학원 입학식도 아니고, 오늘. 벌써 오늘부터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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