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뜨자 이세계로 소환됐다

2화

숨을 죽인 채 나는 먹돌이 바라보는 방향을 살폈다. 나무 사이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 보였다. 바람이 지나갔지만 나뭇잎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바람은 부는데 왜 나무는 그대로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풀벌레 소리도 어느샌가 잦아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들리던 벌레 울음소리가 마치 누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뚝 끊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어긋나 있는 듯한 낯선 파문이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그림자 한쪽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사람의 형체 같기도 했고, 아니면 단순히 나뭇가지가 만든 착시일 수도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그쪽을 응시했다. 몇 초간 시선을 고정한 채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뭘 본 거지.) 심장이 살짝 빨리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누리가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낑낑거렸다.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다리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먹돌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해 자세를 낮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귀가 완전히 뒤로 젖혀져 있었고, 콧등에는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별거 아닐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깨달았다. 숲의 정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은 돌무더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슬쩍 앞질렀다. 돌무더기는 흙이 살짝 부풀어 오른 것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주변의 다른 흙과는 색깔부터 미묘하게 달랐다. 검붉은 빛이 도는 흙 위로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흙을 조금 더 파냈다. 손끝에 차가운 흙의 감촉이 스며들었다. 한 줌, 두 줌, 흙을 옆으로 밀어낼 때마다 먹돌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등 뒤에서 계속 들렸다. (조금만 더... 뭔가 있어.) 손끝에 단단하고 둥근 것이 닿았다.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주변의 흙을 더 걷어냈다. 탁. 작은 돌 하나가 흙 속에서 굴러 나왔다. 크기는 주먹만 했고, 표면에는 흑과 백이 태극 문양처럼 휘감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무늬는 단순한 색의 경계가 아니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미세하게 흐릿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손에 쥐어보니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돌이라기엔 지나치게 매끄러웠고, 무게도 겉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런 게 왜 여기 묻혀 있었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손바닥으로 무늬를 슬쩍 쓸어보았다. 표면이 미끄러운 듯하면서도 손가락 끝에 걸리는 듯한 이물감이 있었다. 먹돌과 누리가 동시에 뒷걸음질쳤다. 털이 곤두선 채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둘 다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재촉하듯 짖었다. 먹돌의 짖는 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고 짧게 끊겼다. 마치 크게 소리를 내는 것조차 두려운 것처럼. "왜 그래, 둘 다." 나는 구슬을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숲은 조용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이제는 편안하지 않았다. 그 순간, 구슬이 손안에서 미약하게 따뜻해졌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뭐야, 이거...) 주머니 안에서 그 온기는 점점 뚜렷해졌다. 처음엔 미열 정도였지만 순식간에 손을 델 것 같은 뜨거움으로 변해갔다. 놀라서 주머니에서 다시 꺼내려던 참이었다. 쿠구궁. 낮은 진동음이 발밑에서 울렸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그 울림이 온몸의 뼈까지 흔드는 듯했다. 돌무더기 주변 흙이 미세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김 같은 것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림자가 짙어지고, 그 안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윤곽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뭉개진 어둠 그 자체 같았다. 가장자리가 마치 연기처럼 흐릿하게 일렁였고, 그 안쪽은 빛조차 삼켜버릴 듯 새까맸다. 붉은 두 점이 그 어둠 속에서 눈처럼 빛났다. 그 붉은빛은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 잠기듯 깊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게... 뭐지. 사람이 아니야.) 숨이 턱 막혔다. 먹돌이 짖으며 그 형체를 향해 몸을 던지려 했다. "먹돌,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목줄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먹돌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힘이 손목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누리는 이미 낑낑거리며 내 뒤로 숨어들었다. 작은 몸을 최대한 낮추고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검은 형체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밑의 흙이 그 무게에 눌려 파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 걸음의 간격은 일정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소리는 없었다. 마치 무게는 있으나 실체는 없는 것처럼. (도망가야 해. 근데 저놈이 개들을 노리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여기서 등을 돌리면 먹돌과 누리가 위험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맞서 싸울 방법도 없었다. 나는 먹돌의 목줄을 힘껏 당기며 뒤로 물러섰다. 발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려 몸이 살짝 기우뚱했다. 그러나 형체의 속도가 순식간에 빨라졌다. 방금까지의 느린 걸음과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그 그림자가 누리를 향해 곧게 뻗어오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