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오른쪽 눈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낯선 색채와 거리감이 아직 어색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세상이 아주 살짝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를 낀 것처럼, 사물의 윤곽선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래도 학교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복도의 시선도,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도 그대로였다.
"저 얼굴 흉터 애 아니야?"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목소리와 함께 아주 옅은 파문 같은 것이 눈에 스쳤다.
(방금 저건 뭐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봤지만, 이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만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발견했다.
어떤 아이의 손끝에서 옅은 잔상이 남는 것 같았다.
필기를 하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끝에 실 같은 흔적이 아주 잠깐 매달렸다가 사라졌다.
또 어떤 아이의 어깨 위로 아주 희미한 흔들림이 스치는 것 같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그 아이의 어깨만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수업 시간에는 아예 집중이 안 될 정도였다.
칠판 글씨보다 앞자리 아이의 뒷모습에서 일어나는 그 미세한 잔상이 더 신경 쓰였다.
(이게… 그냥 눈이 좋아진 거야, 아니면 뭔가 다른 건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분명 예전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쉬는 시간, 짝꿍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야, 너 요즘 왜 그렇게 멍해?"
"어…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대충 둘러댔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의 몸 주위로 옅은 파동이 일었다가 스러졌다.
어떤 것은 색이 있었고, 어떤 것은 그냐 흐릿한 흔들림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방과 후에는 여느 때처럼 공원으로 향했다.
공기는 선선했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먹돌은 옆구리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고, 누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내가 다가가자 누리가 먼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오늘도 잘 있었어?"
나는 무릎을 굽히고 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리는 낑낑거리며 내 손에 코를 비볐다.
먹돌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구리에 남은 상처 자국이 아직 붉게 도드라져 있었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두 녀석을 쓰다듬으며 나는 잠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검은 형체, 그리고 할아버지의 그 단호한 목소리.
그날의 어둠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게 확실해.)
먹돌의 상처를 살펴보던 손끝에서, 순간 아주 짧게 검은 잔상이 스쳤다.
움찔.
나는 손을 떼고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상처 자국뿐이었다.
(방금 그것도… 눈 때문인가.)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자꾸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신경을 갈아먹었다.
누리가 내 손등을 핥으며 관심을 끌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두 녀석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잠깐 시간 있으세요?"
방 안에서 낮은 대답이 들렸다.
"들어오거라."
방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감돌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저녁 햇살이 방바닥에 옅은 주황빛 자락을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낡은 서첩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서첩의 표지는 색이 다 바랬고, 모서리는 손이 많이 탄 듯 둥글게 닳아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방석에 앉으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 하루 종일 눌러왔던 질문들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우리 가문… 뭔가 있는 거죠?"
돌리지 않고 곧장 물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은 여느 때와 달리 깊고 무거웠다.
"우리 집안은 오래전부터 선기라 불리는 것을 다뤄왔다."
낮고 다정한, 그러나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기운이지. 네가 얻은 그 구슬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 구슬… 지금 어디 있어요?"
나는 그날 이후로 구슬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밤마다 잠들기 전이면 늘 그 구슬의 온기가 떠올랐다.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다."
할아버지가 서랍 한쪽을 가리켰다.
낡은 나무 서랍이었다. 오래된 자물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함부로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허나 그것이 네게 반응했다는 건, 이미 인연이 맺어졌다는 뜻이다."
(인연이라니…)
가슴 한쪽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연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또 달랐다.
"할아버지, 저 눈에도… 뭔가 이상한 게 보여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동안 느낀 감각을 털어놓았다.
학교에서 본 잔상들, 아이들의 어깨 위로 스치는 흔들림, 그리고 아까 먹돌의 상처에서 본 검은 잔상까지.
말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것이 태극안의 시작이다."
짧고 단정한 말이었다.
"다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것이 보이게 될 게다."
"그게… 위험한 건가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서첩을 조용히 덮었다.
탁.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방 안에 울렸다.
"모든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낮은 한숨이 뒤따랐다.
"네 부모와 나는 이미 그 대가를 조금씩 치르고 있는 셈이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대가라니… 그게 가족한테 위험이 된다는 뜻인가.)
오래전부터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고로 흉터를 얻던 그날처럼,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그 감각.
그 감각은 언제나 가슴 한복판을 서늘하게 짓눌렀다.
"할아버지, 그날 절 구해준 존재가… 이 일과 관련 있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찻잔을 든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방 안의 정적 속에서 그 작은 멈춤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말해줄 날이 올 거다."
그 이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들리던 풀벌레 소리마저 잠시 멎은 듯했다.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할아버지는 다시 서첩을 펼치고 있었다.
그 옆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날 밤, 나는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에 남은 낯선 감각이 여전히 신경 쓰였다.
눈을 감아도 낮에 본 잔상들이 어렴풋이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구슬은 지금 할아버지 방 서랍 안에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이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할아버지의 말들이 뒤섞여 떠올랐다.
선기, 인연, 대가.
그 단어들이 마치 서로 얽혀있는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고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아주 옅은 빛이 스쳤다.
마치 무언가가 이쪽을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숨긴 것처럼.
그 빛은 아주 잠깐, 창틀 너머의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도, 바람이 지나가는 기척도 없었다.
그저 어둠만이 다시 고요하게 자리를 채웠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이미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