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낯익은 천장이었다.
내 방, 익숙한 벽지의 무늬였다.
옅은 크림색 벽지에 자잘한 꽃무늬가 반복되는, 어릴 때부터 봐온 그 무늬 그대로였다.
(꿈이었나…?)
몸을 일으키려는데 오른쪽 눈두덩이 뻐근하게 당겨졌다.
마치 오랫동안 굳어 있던 근육이 처음으로 움직이려는 듯한, 낯선 통증이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오후의 공기였다.
하지만 몸 전체를 감싸는 이 이질감만은 평소와 달랐다.
"도윤아, 정신 들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닿았다.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걱정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방문 옆에 서 있던 아버지도 다가와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두 분의 얼굴에는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버지의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의 흔적이었다.
"공원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대. 할아버지가 업고 오셨어."
어머니가 이마를 짚어주며 말했다.
그 손길이 따뜻했다.
"몇 시간이나 정신을 못 차렸어. 병원에 데려갈까 하다가,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하셔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다들 걱정했겠지…)
나는 애써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가 막 건져 올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시야 한쪽에서 낯선 감각이 스쳤다.
오른쪽 눈이었다.
십 년 가까이 그저 감겨 있던 자리, 이제는 뭔가가 보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빛의 잔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손을 들어 왼쪽 눈을 가렸다.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방 안의 사물들이 흐릿하게, 그러나 분명히 형체를 갖추며 눈앞에 나타났다.
책상 위의 스탠드, 창가의 화분, 벽에 걸린 시계.
모두가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색이 있었다.
빛이 있었다.
그저 어둠뿐이던 자리에 이제는 세상이 담겨 있었다.
"어…?"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 나… 오른쪽 눈으로 뭔가 보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두 분의 눈에 놀람과 눈물이 뒤섞여 어른거렸다.
"정말이야? 정말 보여?"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감이 나지 않아 자꾸 눈을 깜빡였다.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버지가 낮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인지, 누군가에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방문 밖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방 안의 세 사람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중산복 자락이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스윽.
발걸음마다 천이 스치는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오른쪽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깊고 무거웠다.
주름진 얼굴 위로 오후의 햇빛이 스며들어, 눈가에 진 그늘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들여다보던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내 오른쪽 눈가를 조심스럽게 짚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함께 스며 있었다.
"…옛날, 네가 이 흉터를 얻던 그날 말이다."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날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어린 나를 덮쳤던 무언가,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그림자.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를 감싸던 그 온기만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던 소리, 흙냄새, 그리고 어깨 위로 떨어지던 무언가의 그림자.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지만, 그 순간의 두려움과 안도감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를 구해준 건… 누구였을까.)
오랫동안 품어온 궁금증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고 이후로 늘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물음.
몇 번이고 부모님께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애매하고 짧았다.
누군가는 확실히 나를 구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십 년 동안, 그 물음은 답을 얻지 못한 채 그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그날… 누가 저를 구한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시선을 내려놓았다.
수염 아래 입가가 미묘하게 굳었다.
방 안에 흐르는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두 분 모두 숨을 죽인 채 할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다만, 그 일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새소리마저 어느 순간 잦아든 듯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 속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무언가를 애써 숨기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우연이 아니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가족이 이 일에 얽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스쳤다.
십 년 전 그날, 나를 구했던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존재가 남긴 흉터가, 왜 이제 와서 다시 눈을 뜨는 걸까.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덧붙였다.
"오늘은 쉬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자."
그 말투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삼켜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할아버지가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굽은 어깨, 느린 걸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그 뒷모습에서 유난히 무거운 것이 느껴졌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그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조용히 내 손을 다시 잡았다.
"괜찮아, 도윤아. 할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실 거야."
그 말이 나를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오후의 햇살이 방 안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나는 오른쪽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다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천장의 미세한 균열, 조명의 색감, 벽에 드리운 옅은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도 새로웠다.
하지만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예감이었다.
그 예감은 마치 방 안 어딘가에 스며든 그림자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