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쿵.
밤공기를 가르며 무언가가 땅을 짚었다.
검은 형체의 팔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팔이라기엔 너무 길었고, 관절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누리가 짖으며 뒷걸음질쳤다.
몸이 작아 몇 걸음도 못 가 풀숲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낑, 하는 소리가 목 안에서 새어 나왔다.
(안 돼. 저러다 물리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발끝이 땅을 밀어내는 감각, 다리 근육이 팽창하는 감각,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뒤섞여 지나갔다.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가전무공의 기본 자세.
손목을 안으로 꺾어 상대의 힘을 흘리는 동작이었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쯤 반복했던 그 자세가 몸에 새겨진 대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타악.
검은 팔을 밀어내며 나는 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손목을 타고 올라온 충격이 어깨까지 퍼졌다.
뼈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형체가 낮게 울부짖었다.
소리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마치 여러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것 같았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노인의 신음, 그리고 짐승의 그르렁거림이 동시에 겹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돋았다.
먹돌이 다시 짖으며 형체의 다리 쪽을 물려는 듯 뛰어들었다.
"먹돌, 물러나!"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소리는 이미 늦었다.
먹돌은 이미 몸을 던진 뒤였다.
형체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동작은 느린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이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퍽.
먹돌이 옆으로 튕겨나가며 낮은 소리를 내며 굴렀다.
풀밭 위를 두어 바퀴 구르다 멈췄다.
(먹돌!)
순간 눈앞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누리를 등 뒤로 밀어내고 몸을 낮췄다.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중심을 잡았다.
할아버지가 늘 말하던 자세였다.
"허리는 곧게, 무게는 아래로."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뒷마당에서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주던 손길, 그 감각이 지금 이 순간 몸을 대신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형체가 다시 팔을 뻗었다.
나는 몸을 틀어 팔의 궤적을 피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팔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저건 그냥 그림자가 아니었다.
손끝으로 흙을 움켜쥐고 던졌다.
흙이 형체의 붉은 눈 쪽으로 흩어졌다.
형체가 잠시 흔들리는 사이, 나는 먹돌 쪽으로 몸을 던졌다.
먹돌은 옆구리를 다친 듯 낮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털이 젖어 있었다.
피인지 아닌지 어두워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옆구리를 살짝 짚어보니 먹돌이 낮게 끙 소리를 냈다.
(살았다. 다행이야, 아직은.)
(이대로는 안 돼. 너무 세.)
숨이 가빠졌다.
손목이 저릿하게 아팠고, 다리도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형체는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붉은 눈이 더 짙게 타올랐다.
마치 내가 지쳐가는 걸 지켜보며 즐기는 것 같았다.
(구슬이라도... 아니, 지금 그걸 쓸 시간이 없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방법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형체가 다시 자세를 낮추며 달려들 준비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두 발을 벌렸다.
그때였다.
"물러나거라."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공원 전체를 가르듯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
형체가 순간 움찔하며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붙잡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백발이 섞인 흰 수염, 중산복 차림의 노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한수였다.
걸음걸이는 느긋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세는 조금 전 형체보다 훨씬 무거웠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땅을 짓누르는 듯했다.
"할아버지…?"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안도감과 놀라움이 동시에 밀려와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아무 대답 없이 형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 걸음에 형체가 다시 낮게 울부짖었다.
겁을 먹은 듯한 소리였다.
손끝이 스치듯 허공을 그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르는 그 궤적조차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힘이 형체를 강타했다.
형체가 뒤로 크게 튕겨 나가며 짙은 그림자로 흩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풀잎 몇 개가 힘의 잔여로 흔들리다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먹돌과 누리의 낑낑거리는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저 멀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세상이 뒤틀려 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밤의 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끝난 건가…)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고맙다고, 무서웠다고, 저게 대체 뭐였냐고.
하지만 그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주머니 속 구슬이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세한 떨림이었다.
그러다 점점 강해지며 마치 심장처럼 박동하듯 뛰기 시작했다.
뜨거운 빛이 옷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뭐, 뭐야 이거...)
나는 미처 손을 뻗을 틈도 없었다.
빛이 곧게 뻗어 나와 내 오른쪽 눈, 흉터가 있는 그 자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타악.
뜨거운 통증이 눈 안쪽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머릿속을 새하얗게 지지는 듯한 열감이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미 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며 세상이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