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물소리가 먼저 들렸다.
강은호는 눈을 떴다. 하늘이 낯설었다. 구름의 색이 이상했다. 옅은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방이 밝았다. 몸이 무거웠다.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물비린내가 옷에서 올라왔다.
분명 마우스를 클릭했었다. 채용 공고 배너였다. 이력서를 백 통쯤 넣고도 답장 하나 받지 못한 날이었다. 눈이 시뻘겋게 부어 있었고,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손끝에서 전기가 튀었다. 파직, 하는 소리였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코끝에 닿는 냄새는 분명 흙과 풀, 그리고 강물이었다. 죽은 사람에게서 날 냄새가 아니었다. 죽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강은호는 그 사실 하나에 매달렸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 같다.
강은호는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팔이 떨렸다. 손바닥에 자갈이 박혔다. 따가웠다. 통증도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강가였다. 자갈밭이었다. 물살은 느렸다. 저 멀리 초가지붕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지붕이었다. 지붕의 각도도, 흙벽의 색도, 어디서도 보지 못한 조합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강은호는 고개를 돌렸다. 뒤로는 낮은 언덕이 있었고, 그 위로 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었다. 나무의 잎도 이상했다. 초록이 아니라 청록에 가까웠다. 모든 것이 조금씩 틀어져 있었다. 마치 원래 알던 세상을 누군가 비틀어 놓은 것 같았다.
"이보게."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늙은 남자였다. 삽을 든 채 서 있었다. 흙 묻은 손, 굽은 등, 하얗게 센 눈썹. 남자의 눈은 강은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걱정과 경계가 동시에 섞인 눈빛이었다.
"괜찮은가?"
강은호는 대답하려 했다.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몇 번 벌렸지만 바람 새는 소리만 나왔다. 노인은 삽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흙 묻은 손이 강은호의 어깨를 짚었다. 그 손길이 무겁고 단단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의식이 다시 끊겼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나무 냄새가 났다. 젖은 흙벽. 낮은 천장. 좁은 침상. 어딘가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은은한 향, 말린 풀 냄새 같은 것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한 남자가 옆에 앉아 있었다. 중년이었다. 온화한 인상이었다. 회갈색 수도복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 모양의 표식이 걸려 있었다. 손가락에는 흙 자국이 남아 있었다.
"깨어났군요."
남자가 웃었다. 손을 뻗어 강은호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따뜻했다. 통증이 사라졌다. 강은호는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건 손전등이 아니었다. 사람의 손에서 빛이 나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런데 놀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는 박요한입니다. 이 마을의 신부입니다."
강은호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가... 어딥니까."
"돌샘마을입니다."
낯선 지명이었다. 지도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강은호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잘못된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서울도 아니고, 경기도도 아니고, 한국의 어느 시군구에도 속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김 노인이 강에서 당신을 건졌습니다. 죽은 줄 알았습니다."
박요한 신부가 검은 보리빵 한 조각을 내밀었다. 딱딱했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강은호는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먹어야 삽니다."
강은호는 빵을 씹었다. 맛이 없었다. 텁텁하고 시큼하고 씹을수록 입안이 마르는 맛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빵의 무게가,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확인처럼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강은호는 겨우 그 말을 뱉었다. 박요한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강은호입니다."
"강은호."
신부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낯선 발음처럼 굴렸다. 마치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았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강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울이라고 해야 하나. 지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지금 이 방 안에서 그런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기억이... 흐릿합니다."
신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물그릇을 하나 더 내밀었다. 물맛도 낯설었다. 미네랄이 강한 물이었다.
그 밤, 강은호는 좁은 침상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의 나무 그을음을 세다가 문득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손끝이 저릿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림이 시작됐다.
웅—
소리가 아니었다. 진동이었다. 뒷목이 서늘해졌다. 강은호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소용없었다. 진동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웅—
두 번째 울림이 지나가자 시야가 흔들렸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방 안에 문 하나가 새로 생긴 것 같았다. 강은호는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언가가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노년의 남자였다. 서구식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흰 장갑을 낀 손. 반듯하게 넘긴 은발.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걸음걸이는 정교했다. 마치 오랜 세월 훈련받은 집사처럼,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정중했다. 그런데 목소리에는 존중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예의는 있었지만 온도는 없었다.
강은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상이 삐걱거렸다.
"누구세요."
"저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편하게 노집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여기 어떻게..."
"여기는 당신 안입니다."
노집사가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강은호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당신의 뇌입니다."
강은호는 숨을 멈췄다.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텐데요. 낯선 하늘, 낯선 지명, 낯선 언어. 그런데도 서로 통하는 대화.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은호는 그 말에 뭔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박요한 신부와의 대화는 아무런 어색함 없이 흘러갔다. 언어가 다를 텐데도.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는 지금부터 당신에게 배정된 시스템의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정식 명칭은 조금 거칠게 들릴 수 있습니다."
노집사는 미소 없이 말했다.
"살인자 시스템입니다."
강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 그것도 이세계라는 낯선 세상에서, 뇌 속에서 노인 한 명이 나타나 자신을 '살인자 시스템'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써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장난이죠?"
"저는 유머를 구사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뭡니까, 살인자 시스템이라니. 제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소립니까?"
"정확합니다."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강은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죽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압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지요."
노집사는 손끝으로 허공을 그었다.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숫자와 문양이 나열되어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강은호는 그 문양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몸이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절로 그 문양을 향해 뻗어나갔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거두었다.
"이게 뭡니까."
"당신의 생존 지표입니다."
노집사는 손가락으로 하나를 짚었다. 붉게 빛나는 숫자였다.
"72."
"이건 시간입니다. 정확히는 남은 시간입니다."
"무슨 시간이요."
"당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강은호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있었다.
"72시간 안에 첫 번째 사냥을 완수하지 못하면, 저는 당신 몸의 일부 기능을 강제로 회수하겠습니다."
"기능을 회수한다는 게..."
"팔이든, 다리든, 시력이든. 선택은 제 몫입니다."
"장난하지 마세요."
강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나는 건지 두려운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고 있었다.
노집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그런데 그 정중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저는 당신을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다만 제 방식은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걸 강요라고 부르는 겁니다."
"강요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강은호는 목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사냥이라니, 뭘 사냥하라는 겁니까."
"그건 내일 알게 되실 겁니다."
"지금 말해주면 안 됩니까."
"규칙입니다."
노집사는 그 이상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절은 선택지에 없습니다. 이 창은 당신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숫자는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줄어듭니다."
강은호는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문양을 스쳤다. 아무 감촉도 없었다. 그런데도 손끝에 짜르르한 감각이 지나갔다. 마치 전기가 살갗 밑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다.
"진짜네."
강은호는 낮게 중얼거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이 이미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집사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좁은 침상, 나무 그을음 천장, 창밖에서 들리는 벌레 울음소리. 방금까지 있었던 은발의 남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강은호는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만졌던 반투명한 창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72시간.
숫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세 자리도 아니고 두 자리 숫자였다. 그런데도 그 무게는 삼일 밤낮을 다 합친 것보다 무거웠다.
강은호는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별빛이 스며들었다. 낯선 하늘이었다. 별의 배열조차 익숙하지 않았다. 어느 별자리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별빛 아래, 강은호는 이 세계가 자신이 알던 세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죽음이 강 저편에서 그를 건져 올렸을 뿐,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등 뒤에서 다시 그 진동이 느껴졌다.
웅—
숫자가 하나 줄어 있었다.
71.
강은호는 그 숫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잠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