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강은호는 밭두렁에 서서 낫을 들고 있었다.
손에 익지 않았다. 자루가 미끄러웠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거기, 그렇게 잡으면 손목 나가."
김 노인이 지나가다 소리쳤다. 강은호는 낫을 고쳐 잡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다시 감아쥐었다. 여전히 어색했다.
돌샘마을은 작았다. 초가집 수십 채가 강줄기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지붕은 낮고 둥글었다. 굴뚝에서 아침 연기가 피어올랐다. 밭에는 낯선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노란 이삭이 밀과 비슷했지만 알이 더 컸다. 강은호는 그 곡식의 이름을 아직 몰랐다. 물어보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강에서 떠밀려 오는 일이 이 마을에서는 드물지 않은 듯했다. 박요한 신부가 소개해준 이후로는 다들 그저 '요한 신부님이 데려온 사람'으로 대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물병을 건넸다. 누군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도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문제는 강은호 자신이었다.
낫질을 세 번 하면 한 번은 헛손질이었다. 이삭 대신 흙만 베어냈다. 밭이랑을 넘어가다 발을 헛디뎠다. 무릎이 진흙에 박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사람 진짜 서울에서 왔대?"
"서울이 뭔데."
"몰라. 아무튼 되게 못 하네."
강은호는 애써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는 숫자가 계속 줄고 있었다.
58.
노집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시야 한쪽 구석에 작은 숫자만 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박이 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낫을 쥘 때도, 숫자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았다.
강은호는 낫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아직 높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점심 무렵, 강은호는 김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혹시... 사냥할 도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김 노인은 밭일을 멈추고 허리를 세웠다. 눈을 가늘게 떴다.
"사냥은 왜."
"그냥,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냥, 이라는 말치고는 얼굴이 심각하구먼."
강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김 노인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언가를 짐작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는 사연을 캐묻지 않는 것이 규칙인 듯했다.
김 노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창고로 걸어갔다.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에서 낡은 창 하나를 꺼내왔다. 자루가 갈라진 나무창이었다. 끝에는 뾰족한 돌이 박혀 있었다. 돌 표면에는 오래된 핏자국처럼 검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거라도 써. 대신 잃어버리면 안 돼."
강은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창을 받아 든 손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손목이 창끝의 무게에 끌려 아래로 기울었다.
"근처에 짐승 있어요?"
"산기슭에 들개들 있어. 조심해. 무리로 다녀."
"많이... 위험한가요?"
김 노인은 대답 대신 강은호의 팔뚝을 한 번 훑어보았다. 가늘었다. 낫질 세 번에 한 번은 헛손질하는 팔이었다.
"위험하지. 근데 산다는 게 다 위험하잖아."
그 말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강은호는 창을 고쳐 쥐고 돌아섰다.
들개.
강은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있는 것을 창으로 찌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오후, 강은호는 산기슭으로 향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급격히 좁아졌다. 풀숲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숲은 어두웠다. 나무 냄새가 짙었다. 젖은 낙엽, 흙, 그리고 무언가 짐승의 체취가 섞여 있었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강은호는 걸음마다 조심스럽게 창끝을 앞으로 겨눈 채 나아갔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점점 옅어졌다.
한 시간을 헤맸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발자국 같은 흔적을 몇 번 발견했지만,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 얼굴에 흙이 묻었다. 창을 놓쳤다. 다시 주워 들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팔이 뻐근했다. 갈증이 났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숫자가 눈앞에 떠 있었다.
31.
강은호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속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남의 것처럼 흘러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줄어드는 숫자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은 빛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뭇잎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은호는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강은호는 고개를 들었다. 나무 사이로 노란 눈 두 개가 보였다. 이어서 또 하나. 또 하나. 세 마리였다.
들개가 아니었다. 몸집이 개보다 훨씬 컸다. 어깨높이가 강은호의 허리에 닿을 정도였다. 등에는 억센 털이 곤두서 있었다. 이빨 사이로 침이 흘렀다. 콧등에 남은 상처 자국이 짐승들의 사나움을 짐작케 했다.
숨을 멈췄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귓속에서 자기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저, 저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짐승 중 하나가 몸을 낮췄다. 뛰어들 자세였다. 뒷다리 근육이 팽창했다.
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강은호는 자기도 모르게 창을 앞으로 내밀며 무릎을 굽혔다. 짐승이 뛰어들자 창끝이 정확히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손목에 충격이 전해졌다.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팔 전체가 저릿하게 울렸다.
짐승이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강은호는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팔을 잡고 대신 움직여준 것 같았다.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했다.
남은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강은호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어깨가 바닥에 부딪히며 통증이 번졌다. 흙과 낙엽이 얼굴에 튀었다.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한 마리의 다리를 베었다. 짐승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마지막 한 마리가 그의 팔을 물었다. 이빨이 살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강은호는 소리를 지르며 창을 짐승의 옆구리에 꽂았다.
짐승이 발버둥 치다 멈췄다.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는 것이 보였다.
숲이 조용해졌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그 소리만이 남았다.
강은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팔에서 피가 흘렀다. 소매가 붉게 젖어들었다. 숨이 가빴다. 온몸이 떨렸다. 손가락 끝까지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었다.
죽였다.
살아 있던 것을 죽였다.
속이 뒤틀렸다.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이상하게도 몸 안쪽에서 뭔가 뜨거운 감각이 퍼지고 있었다. 마치 몸이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팔의 상처보다도 그 낯선 뜨거움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강은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하늘이 조각조각 보였다. 자신이 방금 저지른 일이 실감 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얼굴 앞에 가져왔다. 손끝이 짐승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웅—
눈앞에 숫자가 사라졌다. 대신 다른 문구가 떠올랐다.
[첫 번째 조건 완료]
[보상: 신체 강화 1단계 - 반사 신경 향상]
그리고 곧, 노집사가 다시 나타났다. 아까와 같은 정장, 같은 표정. 옷자락에 흙 한 점 묻지 않은 것이 이 숲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강은호는 팔의 상처를 붙잡고 신음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이게, 축하할 일입니까..."
"살아 있으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강은호는 그 담담함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노집사는 허공에 손을 그었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목록이었다. 짐승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늑대, 멧돼지, 곰 같은 이름들 옆에 숫자가 매겨져 있었다. 마치 사냥해야 할 순서를 정해놓은 것 같았다.
강은호는 그 목록을 훑어보았다. 익숙한 짐승 이름들 사이로 낯선 이름들도 섞여 있었다. 어느 것은 짐승이라기엔 지나치게 사람 같은 발음이었다.
그런데 목록 맨 아래, 짐승이 아닌 이름 하나가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강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팔의 통증을 잠시 잊은 채 그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글자가 흔들리듯 뭉개져 있어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사람의 이름 같은 형태였다.
"이건 뭡니까."
노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아무런 정보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강은호는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잠깐만요. 이 이름, 사람 이름 아닙니까? 왜 짐승 목록에..."
이미 노집사의 형체가 흐려지고 있었다. 목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문이 닫혔다.
강은호는 어두워지는 숲 속에서 홀로 남았다. 팔의 통증이 여전히 생생했다. 죽은 짐승 세 마리가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방금 본 목록의 흐릿한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강은호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 이름은, 분명 사람의 이름처럼 보였다.
혹시 저 목록이 앞으로 자신이 사냥해야 할 대상들의 명단이라면.
그 안에 사람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강은호는 팔의 상처를 움켜쥔 채 어두워지는 숲길을 걸어 내려갔다. 등 뒤로 죽은 짐승들의 냄새가 오래도록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