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 첫날, 공자를 죽였다

1화

월세가 밀린 지 석 달째였다. 집주인 할머니는 오늘도 문틈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번 달도 안 내면 짐 다 내놓을 거여!" 목청 하나는 여전히 청호진 상단 종소리보다 우렁찼다. 전생이었으면 임대차보호법이 어쩌고 하면서 버텼겠지만, 여긴 그런 게 없는 세상이었다. 영력 없는 범인 주제에 무슨 법을 따지겠나. 법은 힘 있는 놈들이 만드는 거고, 나 같은 범인은 그 법 밖에서 굶어 죽는 거다. 할머니가 문을 쾅 닫고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불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에 금이 간 모양이 딱 대한민국 지도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나는 강진우다. 전생에는 특전사 출신이었고, 이생에는 청호진 외곽 판자촌에서 굶어 죽어가는 스물세 살짜리 범인이다. 전생과 이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떴더니 이 세계였고, 몸은 갓난아기였고,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그래, 인생 리셋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근데 리셋된 인생이 이 꼬라지면 좀 억울하지 않나. 차라리 대기업 회장 아들로 리셋해줬으면 이 성경 구절도 고맙게 받아들였을 텐데. 하늘도 참 짠돌이다. 이 세계엔 영력이라는 게 있다. 타고난 영력을 갈고 닦으면 수련자가 되고, 수련자는 야수를 사냥해서 영핵을 흡수하고, 강해지고, 부자가 된다. 영동경 초기, 중기, 후기, 원만. 그 위에 화신경이 있고, 그 위는 나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게임 티어표 같은 거다.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그리고 그 위에 있는지도 모르는 챌린저. 나는 그 티어표에 이름도 못 올린 언랭이었다. 영력이 아예 없는 범인. 말 그대로 그냥 사람. 삽질하고 밭 갈고 굶는 존재. 동네 애들도 나보고 "쟤는 그냥 흙수저 중에 흙수저"라고 수군댔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더 억울했다. 그런데 사흘 전에 오른손 손바닥에서 뭔가 만져졌다. 구슬 같은 게, 살가죽 밑에 박혀 있는 것처럼. 처음엔 종양인가 싶어서 겁이 났는데, 통증도 없고 색깔도 이상했다. 푸르스름한 청색. 마치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지 색깔 같기도 하고. 아니, 지금 이 상황에 삼각김밥 생각이 나냐. 근데 진짜로 그랬다. 배가 너무 고프면 뭘 봐도 먹는 것으로 치환되는 그런 현상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그게 뭔지는 몰라도 밥벌이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됐다. 병원에 갈 돈도 없고, 수련자 길드에 감정을 맡길 돈도 없었다. 그냥 손바닥 속에 박힌 채로 사흘을 살았다. 가끔 저 혼자 미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굶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오늘 아침에 청호진 상단 게시판을 봤다. 사람들이 몰려서서 웅성거리는 걸 보고 나도 슬쩍 끼어들었다. [우두야수 목격 보상 - 은자 오십 냥] 은자 오십 냥.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밀린 월세, 밥값, 겨울 땔감값. 그거 다 합쳐도 오십 냥이면 숨통이 트인다. 우두야수는 2단계 야수다. 소 머리를 한 짐승인데, 성인 남자 서넛은 우습게 짓밟는다고 들었다. 영동경 초기 수련자 셋이 붙어야 겨우 상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게시판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거 목격만 해도 오십 냥이여. 잡는 건 미친놈들이나 하는 거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빼고. 나는 그걸 혼자 잡으러 가기로 했다. 제정신이냐고? 제정신이면 이 미친 세상에서 월세를 못 내는 범인으로 살고 있겠나. 어차피 목격만 해도 오십 냥, 잡으면 그 이상일 거다. 계산은 단순했다. 죽으면 어차피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다. 살면 은자 오십 냥 이상. 리스크 대비 리턴이 나쁘지 않다. 전생 특전사 시절 배운 게 있다면, 손해 볼 확률과 이득 볼 확률을 냉정하게 재는 것이었다. 지금 이 계산은 이득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 있었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랬다. 전생의 특전사 훈련 기억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야간 침투, 매복, 기습. 영력은 없어도 몸은 움직였다. 근력, 반응속도, 지형 파악 능력. 이런 건 영력이랑 상관없이 그냥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달에 진짜로 쫓겨나면 나는 얼어 죽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낫을 숫돌에 갈았다. 쓱, 쓱. 날이 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낡은 물통에 물을 채우고, 헌 옷을 겹쳐 입었다. 이게 내 원정 준비의 전부였다. 탐험대 장비라기보다 그냥 밭일 나가는 농부 차림이었다. 청호진 북쪽 야산으로 들어갔다. 낙엽 밟는 소리조차 죽이려고 발을 사선으로 디뎠다. 전생 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이럴 때 느낀다. 발바닥부터 무게를 천천히 옮기고, 마른 가지는 피해서 밟는다. 숨소리도 최대한 낮게, 코로만 짧게 쉬었다. 산속 공기는 차가웠고, 입김이 나올 때마다 그것마저 손으로 가려 흩어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뭔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냥 바람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그것도 참았다. 소리 나는 건 뭐든 조심. 덤불 사이로 소머리가 보였다. 크다. 생각보다 훨씬 크다. 사람 몸통 두 개는 될 것 같은 덩치였다. 뿔은 낫보다 훨씬 두껍고 날카로워 보였다. [욥기 39:9, 들소가 어찌 즐겨 네 곁에서 살며 네 마초 옆에서 머물겠느냐] 그러니까 저건 내 마초 옆에 있을 놈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저놈 밥그릇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정확히는 저놈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으러 온 도둑놈이었다. 숨을 죽이고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손에는 낫 하나. 이게 내 전투 장비의 전부였다. 농기구로 2단계 야수를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미쳤지만, 목을 노리면 승부는 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등급이 아니라 각도의 문제니까. 전생에서도 그랬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각도와 타이밍을 못 맞추면 무용지물이고, 장비가 후져도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지점을 찌르면 이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그 판단력이었다. 놈이 풀을 뜯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뛰어들었다. 낫을 목덜미에 박아넣었다. 푸확! 예상보다 저항이 훨씬 약했다. 낫이 살을 파고들면서 손목까지 뜨끈한 피가 튀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확 찔렀다. 놈이 울부짖으며 몸부림쳤고, 나는 낫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매달렸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 뿔에 옆구리를 받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몸으로 들었다. 빠직, 하는 그 소리가 뇌까지 울렸다.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하얗게 흔들렸다. 그래도 낫은 놓지 않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전생에서 배운 딱 하나는, 물러설 곳이 없으면 앞으로 가는 게 유일한 답이라는 거였다. 후퇴할 곳이 없다는 건 사실 꽤 명료한 상태다. 선택지가 하나뿐이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이빨을 악물고 낫자루를 더 깊이 밀어넣었다. 놈이 마지막으로 크게 몸을 뒤틀었다. 그 순간 낫이 목뼈를 완전히 갈랐다. 쿵!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나도 같이 쓰러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옆구리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하늘을 봤다. 나뭇가지 사이로 회색 하늘이 보였다. 살았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건, 갈비뼈가 몇 대나 나갔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손바닥 안의 그 구슬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각성이 시작됩니다] 뭐? 지금 이 문구가 왜 여기서 뜨는 건데. [각성이 시작됩니다] 이거 게임 로딩 화면 아니냐고. 로딩 바는 어디 있고, 광고는 왜 안 뜨는 건데. 아니 이 와중에도 헛소리를 하고 있다니, 나도 참 어지간한 놈이다. 청구슬이라 부르게 될 그 구슬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손등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밝기였다. 살가죽 안쪽에서부터 새어나오는 그 청색 빛이 내 손 전체를 물들였다. 죽은 우두야수의 몸에서 뭔가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와 내 손바닥으로 빨려들었다. 안개는 마치 자석에 끌리듯 곧장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핵을 흡수하는 건가? 야수를 잡은 수련자가 저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수련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범인이다. 영력 자체가 없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몸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듯 뒤집히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뜨거운 게 흐르는 느낌. 장기가 재배열되는 느낌. 마치 몸속에 누가 들어와서 가구를 다시 배치하는 것 같은, 그런 기묘하고 폭력적인 감각이었다.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차라리 갈비뼈가 부러진 통증이 훈훈한 기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조화신공 - 1차 정화 완료] [영동경 초기에 도달했습니다] 초기? 죽다 살아난 대가로 딱 초기라니, 이거 완전 가성비 나쁜 거래 아니냐. 목숨 걸고 2단계 야수를 잡았는데 겨우 티어표 맨 아래 칸이라니. 이럴 거면 그냥 배달 알바를 뛰는 게 시급으로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앞이 다시 새하얗게 번쩍였다. 두 번째 파도가 몰아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강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땅바닥이 흔들리는 건지, 내 몸이 흔들리는 건지도 구분이 안 됐다. 귓속에서 이명이 윙윙 울리고, 시야 끝이 자꾸 검게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집주인 할머니한테 월세는 낼 수 있으려나.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