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 첫날, 공자를 죽였다

3화

"형, 저거 그냥 잡자." 동생 쪽 남자가 검을 뽑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딱 봐도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둘째야, 흥분하지 마라. 4단계로 보인다." 형이라는 남자가 손을 들어 동생을 제지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동생을 챙기는 형 특유의 그 억양, 어디서나 통하는구나 싶었다. 4단계라니. 숫자만 들어도 등급이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게임 좀 해본 사람이면 다 안다. 숫자 앞에 "그냥"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건 절대 그냥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 두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청호진에서 저런 옷차림에 저런 검을 차고 다니는 애들은 대체로 대가문 자제들이었다. 비단으로 된 도포, 손잡이에 옥이 박힌 검, 그리고 뭔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을 법한 저 여유로운 눈빛. 임가, 최가, 송가. 청호진 3대 가문 중 하나일 것이다. 동네 편의점 알바생도 저 셋 중 하나 이름은 안다는 게 이 마을의 상식이었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 형이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그 눈빛엔 경계심과 호기심이 반쯤 섞여 있었다. 낫 한 자루 들고 야산 한복판에 있는 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상황이 터졌다. 혈문호가 둥지 방향으로 다가서는 동생을 향해 몸을 낮췄다. 크르르릉! 낮게 깔리는 그 울음소리가 배 속까지 울렸다. 동물이 저렇게 울면 십중팔구 경고다. 근데 저 경고를 알아듣는 인간은 흔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동생 쪽 남자, 임도현이라고 나중에 알게 될 그 사람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면 나도 잡을 수 있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영동경 원만. 그게 임도현의 경지였다. 나쁘지 않은 경지였다. 솔직히 이 나이대치곤 준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어미 혈문호를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와 그냥 지나가다 눈에 걸린 인간, 이건 애초에 급이 다른 싸움이었다. 형이 소리쳤다. "도현아! 뒤로 빠져!" 절박한 목소리였다. 동생을 부르는 그 톤에서 형이 이미 뭔가를 감지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혈문호가 앞발로 도현을 후려쳤고, 도현이 검으로 막았다. 캉! 검이 부러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도현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바닥에 발이 두 번 튕겼다가 겨우 멈춰 섰다. 숨이 거칠어진 게 여기서도 보였다. [전도서 9:12, 사람도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난의 그물에 걸리는 것과 같이... 인생이 재앙의 날을 만나면 그렇게 걸리느니라] 하필 이 순간 그 구절이 떠올랐다.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걸린 건 도현인데, 그물을 짜준 건 대체 누구인지. 성경도 가끔 보면 스포일러를 이렇게 던지는 게 너무하다 싶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끼어들면 위험하다. 저 어미 혈문호는 이미 눈이 반쯤 돌아 있었다. 하지만 안 끼어들면 사람이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을 것 같은 게 아니라 죽는다. 저 속도, 저 각도, 저 위치. 전생 특전사 시절 계산 감각이 어디 안 가고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전생 특전사 시절이었으면 무조건 개입했겠지만, 지금 나는 아직 이 세계 룰을 모르는 범인이었다. 낫 한 자루로 5단계 짜리 짐승을 상대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했다. 근데 몸이 그런 계산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낫을 쥔 손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머리로 결정하기도 전에 다리가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이게 몸이 더 단단해졌다는 그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냥 본능인지 구분할 새도 없었다. 혈문호가 두 번째로 도현을 향해 앞발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몸을 던져 도현을 밀쳤다. 쾅! 앞발이 내 옆구리를 스쳤다. 갈비뼈가 다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뻑, 하고 뼈가 어긋나는 그 익숙한 소리. 전생에도 몇 번 들어본 소리라 이제는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만큼 아프지 않았다. 몸이 더 단단해졌다는 걸 실감했다. 아파야 정상인데 아프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한 이 상황. 도현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다친 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혈문호의 몸이 이상하게 변했다. 붉은 무늬가 더 진해지고, 몸집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털이 곤두서면서 비늘처럼 각이 서는 느낌이었다. 저건 그냥 흥분한 게 아니었다. [혈문호 - 진화 시작] 뭐? 지금 이 상황에서 진화라니. 야수도 스트레스 받으면 진화하는 세상인가. 나 같으면 스트레스 받으면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는데, 이 세계 짐승들은 스트레스를 진화로 푸는구나. 참 건강한 대처법이었다, 인간 입장에선 최악이지만. 놈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동공이 사라지고 그냥 핏빛 구슬 두 개가 박힌 것처럼 보였다. 4단계에서 뭔가 한 단계 더 넘어가는 것 같았다. 형이라는 남자, 임지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현아, 도망쳐!" 하지만 진화한 혈문호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방금까지 느릿하게 몸을 낮추던 그 짐승이 아니었다. 놈이 몸을 낮추고 그대로 도현을 향해 튀어나갔다. 촤아아악! 순식간이었다. 바람 소리조차 제대로 못 들었다. 혈문호의 아가리가 도현의 머리를 그대로 물어버렸다. 뻐걱.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너무 조용하고, 너무 짧고, 너무 확실했다. 방금 사람 한 명이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는 걸 알리는 소리치고는 너무 단출했다. 도현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도현아!!!" 임지훈의 비명이 야산을 뒤흔들었다. 새들이 놀라서 날아올랐다. 그 소리마저도 지금 이 순간엔 잔인하게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 방금 사람이 죽었다. 내 눈앞에서. 내가 밀쳐낸 도현이, 그 직후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다가 죽었다. 이게 인과인가, 아니면 그냥 재수인가. 내가 밀치지 않았으면 도현이 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계산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돌리고 있었다. 머리를 싸매쥐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혈문호가 도현의 몸을 내려놓고, 다시 붉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참 담백했다. 방금 사람 하나를 죽인 짐승의 눈이라기엔 너무 무심했다. 놈의 시선이 이번엔 임지훈과 나, 둘 사이를 오갔다. 임지훈의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뭔지 모를 광기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그 눈빛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검을 겨눴다. "네놈이... 도현이를 죽였어." 아니, 이건 좀 억울하다. 내가 밀친 건 도현이를 구하려 한 거였는데, 이게 왜 내 탓이 되는 거지. 논리적으로 따지면 내가 개입 안 했으면 도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앞발에 맞아 죽었을 거다. 결과가 같은데 과정만 바뀐 거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해봤자 저 광기 어린 눈빛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슬픔이 논리를 이기는 순간이란 게 있다는 걸, 나는 그의 눈에서 똑똑히 읽었다. 혈문호가 다시 낮게 울부짖으며 몸을 낮췄다. 이번엔 임지훈을 노리는 건지, 나를 노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놈의 시선이 계속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고 있었다. 저건 사냥감을 고르는 눈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미친 짐승 하나와 슬픔에 미쳐가는 화신경 수련자 하나, 그 사이에 낀 나. 옆구리는 나가고, 낫 한 자루밖에 없는 나. 이거 완전히 삼자대면 갑질 현장 아니냐. 근데 갑질 당하는 쪽이 나 하나뿐인 것 같아서 더 서러웠다. 분명 나는 사람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는데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제일 위험한 위치에 서 있는지. 임지훈이 검을 든 채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번쩍였다. 발걸음마다 흙이 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둘 다... 오늘 여기서 죗값을 치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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